내가 국내 최대의 교육재단을 설립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가지 반응이 나왔다. 평소 잘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돈을 짜게 벌어서 뭘 하려고 하나 했더니 그런 좋은 일에 쓰려고 한 것이었구만, 참 놀라운 일이야”라고 했다. 그러나 “그 돈을 어떻게 모은 건데 다 내놓다니 믿을 수 없어. 다른 속셈이 있을 거 아냐?”라는 사람도 있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천사가 따로 있나? 이런 사람이 천사지!”에서부터 “아무리 좋은 뜻이지만 다 내놓을 필요까지야 없지 않을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또는 “큰 덩치 돈은 따로 감춰 두고 쇼 하는거 아냐 ?”라는 비아냥거림까지 있다고 했다.
나도 이러한 엇갈린 반응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가 천사인 척해도 천사일 수 없고,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 선의를 제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기업인이 평생 애써 번 돈을 누군들 쉽게 내놓으려 하겠는가? 그러나 나에게는 좀 특별한 동기가 있었다. 그것을 여기에 밝혀 두려 한다.
첫째로는 유가(儒家) 집안의 면학 분위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렸을때부터 사랑채에서 조부님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자랐다. 특히 조부님께서는 우리 집안의 중시조이시며 고려 말의 대유학자이신 둔촌공(遁村公) 이집(李集) 선생께서 후손에게 이르신 아래와 같은 말씀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 주셨다.
讀書可以悅親心(독서가이열친심) 독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니
勉爾孜孜惜寸陰(면이자자석촌음) 시간을 깊이 아껴 힘써 독서하라
老矣無能徒自悔(노의무능도자회) 늙어서 무능하게 되면 후회가 되리라
頭邊歲月苦駸駸(두변세월고침침) 머리맡의 세월은 괴롭도록 빠르니라
遺子滿籯金(유자만영금) 자식들에게 광주리에 가득 금덩어리를 주어도
不如敎一經(불여교일경) 경서 한 권 가르침보다는 못하니라
此言雖淡薄(차언수담박)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이나
爲爾告丁寧(위이고정녕) 자식들 위해 간곡히 알려 둠이니라
또 명심보감(明心寶鑑) 계선편(継善篇)에 나와 있는 사마온 공의 말씀을 자주 해주셨다.
積金以遺子孫(적금이유자손) 돈을 모아 자손에게 남겨 준다 해도
未必子孫能盡守(미필자손능진수) 자손이 반드시 다 지킨다고 볼 수 없고
積書以遺子孫(적서이유자손) 책을 모아 자손에게 남겨 준다 해도
未必子孫能盡讀(미필자손능진독) 자손이 반드시 다 읽는다고 볼 수 없다
不如積陰德於冥冥之中(불여적음덕어명명지중) 남모르게 음덕을 베푸는 것이
以爲子孫之計也(이위자손지계야) 자손을 위한 좋은 계획이니라
비록 당시 생활환경이 매우 어려웠지만 자손들에게만은 긍지와 올바른 인품을 지니도록 가르쳐 주신 부모님 및 조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둘째로 나는 1943년 봄부터 6개월간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삶을 산 적이 있다. 해방 전 사회가 안정되지 못하던 시절 나는 고향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모교인 의령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교사가 부족하던 당시 학교에서는 졸업생 중에서 일본유학 경험까지 가지고 있던 나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교육학 및 교수법에 대한 기본 개념도 모르고 있었지만 모교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고향의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을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승낙을 했다. 특히 후배들에게 애국심과 효행을 강조하고 새 학문을 닦고 체력을 기르도록 가르쳤다.
교사 생활 중에서 내 머릿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공부도 잘하고 착실해 보이는 학생이 어느 날 결석을 한 것이다. 학교 안 나오는 날이 길어지자 나는 그 학생의 집을 방문했다. 그 집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었고, 학생은 마당에서 집안일을 거들고 있었다. 학생의 부모님께서는 손을 비비면서 월사금 낼 형편이 못 되어 그러니 용서해 달라고 했다. 당시 내 형편으로는 어찌할 방법이 없어 그대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월사금 낼 돈이 없어서 배움의 기회를 놓치다니 ……. 지금도 그때의 안타까운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나의 지도를 받았던 학생들 중에 권복경 군과 서영훈 군이 떠오른다. 권복경 군은 나중에 치안본부장이 되어 국가 경찰력 증진에 큰 공을 세웠고, 서영훈 군은 부장판사가 되어 법조계의 명망을 얻었으니 나의 교사 생활도 허송세월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셋째 나는 젊은 시절에 이미 모교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경험이 있다. 1960년대 초 영등포에서 삼영화학공업사를 경영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맨주먹 하나로 회사를 설립한 시기라 눈코 뜰 새 없을 만큼 바빴다. 경영 상태도 궤도에 오르지 못한 형편이라 나 자신 무척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모교(마산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동창생 공 모 군이 나를 찾아왔다. 그 동창생은 경남의 수재들 이 모인 모교에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 월사금을 제때 못 내고 학업을 그만두는 후배들이 많아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궁리 끝에 장학금 마련을 위해 서울행 기차를 탔다는 것이다.
하지만 넉넉한 사업가로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판단했음인지, 고개를 떨구고 돌아서는 친구를 내가 불러 세웠다. 아무리 제품 만들 재료비와 직원들 급료를 제날짜에 지급하지 못해 턱이 닳게 은행 창구를 찾아다닌다 해도 아무렴 그 정도 장학금 하나 마련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나는 친구를 나무랐다. 그리고 매년 모교에 장학금을 보내 주기로 약속했다.
장차 국가를 경영할 인재들이 돈이 없어서 학업을 접어야 한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한 일인가? 나는 그 약속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것도 조금씩 늘려가며, 내 사랑하는 모교 후배들의 향학열에 불을 지펴주었다.
그러다가 2002년 봄 12억 원의 장학금을 지원하여 모교 후진들이 학비 걱정 없이 이 나라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으며, 더불어 재학생 기숙생활관 건축비와 운영비로 6억 원을 더 지원할 수 있게 되어 나름대로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