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사업, 정미소 (20회)

사업이란 장대높이뛰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제조업은 제조업대로, 서비스업은 서비스업대로 끊임없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도전해야 한다.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선수라 하더라도 잠시만 방심하면 뒤처지게 된다.

마산에서 내 고향 의령으로 향하면 저 멀리 지리산의 한 줄기인 자굴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큰 들판이 펼쳐진다. 함안평야이다. 이 함안평야를 가로질러 군북에서 남강을 건너면 의령에 속하는 정암평야가 나타난다.

정암평야는 함안평야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지만 광활한 보리 생산지로 유명하다. 예전에는 경상도 사람을 ‘보리문둥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보리 생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산에서 중학교 다닐 때 방학을 맞아 집에 가려면 으레 그 넓은 들판을 지나가야 했다. 그때마다 ‘이제 고향이 가까웠고, 집에 들어서면 어머니가 차려 주신 맛난 밥상을 대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저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다.

그러나 학병에서 살아 돌아와 고향에 머물면서부터는 의령이나 함안의 들판을 지나가도 더 이상 내 마음이 평화롭지도 한가하지도 않았다.

‘장차 어떻게 내 생을 개척하고 집안을 이끌 것인가.’
‘저 들판이 아무리 넓은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그러던 어느 날 ‘그 너른 들판의 수확이 왜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말하자면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이 넓은 보리밭을 한 순간에 내 손에 넣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여기서 수확하는 보리를 내가 찧을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분명 사업가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정암평야에서 해마다 보리 3천 석을 수확하는데 그 시절에 보리방아를 찧어 주면 1할 5부에서 2할은 삯으로 받을 수 있었다. 내 안에서 뭔가 불끈 솟구치는 것이 있었다.

▲ 출생지인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 직접 신축 헌정한 문중의 추모재가 자리하고 있다

‘옳다, 정미소를 차리자. 내가 지금은 보리방아 찧어 주는 일로 시작하지만 언젠가 이 들판을 반드시 정복하겠다.’

그 길로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 정미소를 짓는 일에 돌입했다. 집안 소유의 임야가 남아 있었기에 사업 아이디어를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옛말에 ‘집 짓기가 밥 짓기’라고 했던가? 한 마을에서 집짓는 일이 벌어지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거들어주는 덕에 집주인은 밥만 부지런히 지어 나르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후덕한 자친께서 평생 이웃에게 살뜰히 대하셨기에 너도나도 힘을 보태주었다. 그러나 내가 막상 당해 보니 집 짓는 일은 밥을 짓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생각보다 일꾼을 많이 써야 했고 애도 억수로 먹었다. 오로지 ‘저 너른 들판을 꼭 내 손에 넣겠다’는 각오 하나로 버텨 정미소를 완공했다.

한 해 동안 발동기를 부지런히 돌리니 450가마에서 500가마 정도의 보리쌀이 삯으로 들어왔다. 나는 발동기실에 앉아 기계 돌리는 일을 책임졌고, 삯 받는 일은 친구에게 맡겼다. 일거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정미소 안이 보리쌀 찧을 때 나오는 뿌연 먼지로 자욱했다.

내가 그때 돈벌이를 한답시고 집을 떠나 어디로 나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에서 밀수꾼들 틈에 끼여 아등바등하다가 나동그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정미소 일은 그런 위험이 전혀 없었다.

기계를 돌리면 돌리는 만큼 어김없이 내게 이익이 돌아왔다. 찧은 보리의 1할 5부, 또는 2할은 앉은 자리에서 삯으로 받았다. 참 정확한 비즈니스였다. 아직 세상 쓴맛도 모르는 내가 전깃불조차 들어오기 전인 고향집에서 내 처지와 분수에 걸맞게 잡은 최상의 비즈니스였던 것 같다.

출생지인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직접 신축 헌정한 문중의 추모재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1년 반 동안 정미소 일에 죽자고 매달리니 어느 새 논 200마지기 살 돈이 모아졌다. 그러나 너무 무리했는지 몸에 이상이 생겼다. 병이 난 것이다. 그것도 보통 병이 아니었다. 남강과 낙동강의 지류가 지나가는 내 고향에 는 민물고기를 먹고 간디스토마에 걸리는 사람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