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는 치료약이 없었다. 그래서 백이면 아흔아홉은 죽는 것으로 여겼다. 그 죽을 병에 바로 내가 걸린 것이다. 팔팔한 젊은 나이에 사업 밑천을 허물어 병치레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근 도시의 의사가 먼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구의 더 큰 병원 의사도 난색을 보였다.
결국 피땀 흘려가며 번 돈으로 논은 한 마지기도 사보지 못하고 정미소 문을 닫았다. 서울로 올라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서 여섯 달을 누워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회복될 가망이 없는 듯했다. 나중에는 몸이 음식을 전혀 받지 않아 먹는 대로 토해 내는 바람에 피골이 상접하여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을 병이면 내 집에 가서 죽자’ 생각하고 낙향을 하는 도중 문득 옛날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김천수 박사다. 1946년 맹장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다. 왜 갑자기 그분이 생각났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마산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그 분을 만났으며, 참으로 기적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병원에 입원한 지 열흘도 안 되었는데 병세가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승길 떠날 채비 말고는 할 일이 없는 걸로 알고 절망에 빠져 있던 내가 거짓말처럼 살아났다. 내 생명의 은인인 김천수 박사는 후일 박정희 정권 때 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나니 정미소 사업을 재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몸 상해 가며 보리방아 찧어 모은 목돈을 병치레로 거의 다 까먹다니……. 세상일이란 게 만만치가 않구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 차라리 직장을 잡아 도시로 가자. 한동안 월급쟁이로 열심히 일하면 돈도 벌고 건강도 나아지겠지.’
내 목표는 부산 세관이었다. 당시 변변한 기업이 있어 취직 시험을 칠 기회가 주어졌던 것도 아니고, 믿을 만한 직장이라면 세관하고 세무서밖에 없었다. 부산 세관이 가장 대우가 좋고 장래성이 있다고들 했다. 일단 서울로 올라갔다. 다급한 마음에 아는 사람을 통해 취직 부탁을 했다.
재무부 어느 과장에게 쌀 두어 가마니 가량의 돈을 주었다. 그 결과 세관에 취직이 됐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내가 지망했던 부산 세관이 아니라 여수 세관으로 발령이 났다. 어떻게 해서든 장래성도 있고 고향과도 가까운 부산 세관 쪽으로 옮겨 달라고 다시 신신당부를 했다. 그저 “기다려 달라”는 막연한 답이 되돌아올 뿐이다.
서울에서 허송세월 하던 차에, 생일이 내일모레로 다가왔다. 타지에서 처량하게 생일을 맞는 게 싫어서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미역국이나 먹고 다시 올라가리라 마음먹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생일 밥상을 받은 게 양력으로 5월 10일, 서울에서 누가 불러 주는 것도 아닌 데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면 무엇 하랴, 그럭저럭 한 달여를 집에 더 머물러 있었는데 6.25가 터졌다. 어머니께서 내 손을 붙들고 말씀하셨다.
“그냥 서울에 머물러 있었으면 어찌 되었겠느냐, 이것도 다 네 운이다.”
UN군이 참전하느냐 마느냐 지체하고 있는 동안 인민군은 삽시간에 대전을 지나 남쪽 땅으로 내려왔다. 정부도 서울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다. 형이 먼저 세상을 뜬 뒤 외아들이 되어 징집은 면한 상태였던 나 또한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마산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지 마산에서 꽃같이 어여쁜 처녀를 만나 결혼을 했다. UN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하며 서울을 수복했고,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한 연합군도 반격에 성공하여 북으로 올라갔다. 나는 곧 마산에서 의령으로 되돌아왔다. 남강 다리가 폭파되어 배를 빌려 강을 건널수밖에 없었다. 개울가에 널린 인민군 시체를 외면하며 고향 땅으로 들어섰다.
1951년 여름에 정전회담이 시작되었으나 38선 부근 주요 격전지에서는 남북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포성이 끊이지 않았다. 남녘땅에서는 부산 임시정부 체제하에서 그럭저럭 일상사의 애환이 이어져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