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고향 근처 함안의 군북 마을을 지나다가 우연히 복사꽃이 장관인 과수원을 발견했다. 길가에서 벗어난 산 너머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때까지 존재를 알지 못했던 과수원이었다. 어떤 인연이 있어 그 날 따라 나를 그 낯선 길로 이끌었는지, 강물에 떠내려 오는 복사꽃 향기에 이끌려 무릉도원을 구경했다는 어부처럼 나도 도화향(桃花香)에 홀렸었는가?
예로부터 여염집 울타리 안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지 말라고 했다. 이유인즉 복사꽃이 피는 봄철에 딸이나 며느리가 바람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복사꽃 밭에 머물며 마음이 싱숭생숭, 봄기운에 어질어질할 지경이 되고 보니 그 말이 딱 이해가 갔다.
복사꽃 흐드러진 풍광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더 없는 황홀경으로 빠져들게 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막 터져 오르는 꽃망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온몸에 느껴졌다. 전쟁의 혼란에 전혀 침범 받지 않은 듯한 고요하고 평화로운 땅이 봄볕 아래 새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봄의 시심(詩心)인가?
집에 돌아온 뒤에도 그 과수원이 눈에 삼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땅이나 집을 사고 파는 일에 긴 시간 고민하는 법이 없다. 마음이 동하고 뒷감당할 계산이 서면 그대로 일을 저지른다. 과수원의 임자는 나와 한 고향에서 운전을 생업으로 하던 분이었다. 그 당시에 운전사면 인텔리로 쳤고 경제적으로도 꽤 부유한 편에 들었다. 그분이 운전 일을 그만두고 가꾼 과수원이었다. 나는 만평이나 되는 그 과수원을 덜컥 사들였다.
그 무렵 경상남도에는 과수원이 드물었다. 그러니 나 또한 과수원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면서, 과수원을 해서 돈 벌 생각도 아니면서, 그저 복사꽃이 좋아서, 오로지 풍류적인 기분으로 샀다. 그만큼 감상적이었다.
과수원 근처에 정미소를 지었다. 병마에서 풀려난 직후에는 정미소 일을 다시 붙든다는 게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그러나 취직자리를 구하려고 노력하다가 제대로 안 되고 전쟁까지 터지고 보니 내게는 역시 정미소 일이 본업이다 싶었다. 한번 해 본 경험이 있어서 정미소 사업이 얼마나 확실하게 이익을 보장해 주는 사업인 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자신 있게 밀어붙였다.
버드나무로 공장을 지었고 일본의 니에가 철공소에서 만든 45마력짜리 디젤 발동기를 들여놓았다.
‘10마력 발동기를 가지고도 재미를 봤는데 이번에는 그에 견줄 바가 아니다.’
나는 큰돈을 벌어들일 것이라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었다. 첫 번째 정미소는 그런대로 재미를 보았으나 희귀병을 앓는 바람에 부득이 폐업을 하였고, 두 번째 정미소에서는 뜻하지 않게 기계가 말썽을 부렸다. 바라만 보아도 든든하던 값비싼 일제 발동기가 그렇게 허망하게 고장이 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발동기를 돌리는데 휠의 한 가운데가 점점 틀어지더니 어느 순간에 툭 부러져 튕겨나가면서 벨트가 벗겨졌다. 정미소는 순간 굉음에 휩싸였고 나는 집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을 정도로 혼비백산했다.
그 이후에도 발동기는 ‘GMC’ 트럭에 실려 마산까지 수차례 갔다왔다를 반복했다.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 왔다는 한국 기술자가 고칠수 있다고 큰소리를 쳐서 실어 보내면 “용접을 잘 했으니 이제 아무문제가 없을 겁니다” 장담을 하며 내려놓고 갔다.
그러나 같은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자 불안해서 도저히 그 발동기를 쓸 수가 없었다. 덜컹덜컹 소리만 요란했지 제 구실을 전혀 하지 못했다. 끝내 기술자들도 제일 중요한 부위가 손을 쓸 수가 없을 만큼 고장 났다며 손을 들었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1년 반 만에 포기하고 허무하게 정미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정미소를 졸지에 정리하려고 하니 풍류로 사들인 과수원도 처분해야 옳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제야 세상일이란 늘 계획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치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때가 1953년 여름. 환도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는 피난민들 행렬이 이어질 때였다.
서울로 갈까, 부산으로 갈까? 두 번째 정미소를 열었다가 실패한 참담함이 나를 다시 서울로 내몰았다. 아는 사람 마주치기 쉬운 부산보다는 서울로 올라가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뒤섞여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지폐 두 무더기와 옷가지를 꾸려 담은 가방을 들고 구마산 역에서 밤기차를 탔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자본을 들고 6 . 25의 상흔으로 폐허가 된 서울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