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서울은 나 같은 타지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많이 있었다. 명동이나 충무로는 잿더미가 되어 폭삭 주저앉았지만 명륜동이나 혜화동에는 포화를 피해 온전히 남아있는 기와집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임시로 거처를 정한 후, 서울살이를 일찍 시작해서 ‘서울 사는 시골부자’ 소리를 듣던 친척을 찾아가 상의했다. 그분에게서 “그 돈이면 두어 달 생활비는 되겠다”라는 말만 듣고 나왔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사나’ 정미소 일을 접을 때 이제 제조업에는 다시 손을 안 댄다고 스스로 맹세했었다. 아니, 사실은 맹세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다시 제조업에 손을 대고 싶어도 그럴만한 자금이 없었으니 말이다. 지폐 두 무더기 들고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보따리장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동대문시장으로 가서 하루 벌어 하루 살 궁리를 하는 인파 속에 섞여 들었다. 정말 팔도 한량은 다 모인 것 같았다. 1•4 후퇴 때 내려온 함경도, 평안도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상해에서 온 사람, 일본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대부분의 시설이 폭격을 맞아 생산 기반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수입해 와야 했다. 말하자면 보따리장수도 제법 벌이가 되었다. 그러나 보따리장수를 하려 해도 달러가 필요했다. 미국에서 전후 복구를 위한 달러를 원조해 주었지만 민간인은 달러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공식 환율이 100대 1이면 시중에서는 그 두 배로 암달러가 거래되었다. 그러니 미국 원조 달러 몇 푼을 따내는 것 자체가 이권이었다.
민간인들도 원조 달러 몇 푼을 따내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제일은행 본점 옥상에서는 매일 한국은행이 주관하는 달러 경매가 벌어졌다. 원조 달러를 배정받으면 바로 신용장을 개설하여 수입 ‘오더’를 냈다. 달러 경매에서 배정받은 달러로는 미국 정부의 이른바 ‘바이 아메리칸 정책(Buy American Policy)’에 따라 미국과의 교역만 가능했다. 수입업자들은 저평가된 미국 달러로 물건을 사서 시장 환율로 일반인에게 팔았으니 수입만 하면 엄청난 이익이 보장됐다.
지금의 충무로 1가 신세계백화점 옆 제일은행 본점은 한국의 근대철골 구조물로는 초기에 지어진 것이다. 화강암 외벽에 천장에는 석고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한국은행 본관과 마주보고 있는 이 건물의 옥상이 달러 경매 장소로 사용되었다. 천정이 높아서였을까, 4층 옥상은 요즈음 건물의 6~7층 정도 높이는 되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그 계단을 수시로 헐레벌떡 뛰어 오르내리며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였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무역상이 거의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병철 씨의 삼성물산, 구인회 씨의 반도무역, 설경동 씨의 대한산업 같은 무역 회사들의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주위 상황을 보니 면사 수입이 해볼만했다. 광목 200필짜리 한 덩어리를 사들여 값이 올랐을 때 팔면 크게 이익이 남는 것 같았다. 나도 그 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판단 착오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매번 손해를 보았다. 물건을 넘기기 위한 가격 흥정이 벌어졌을 때 능란하게 부풀려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수완이 내게는 없었다.
브로커에게 원가의 마지노선을 말하고 “얼마는 받아야 인건비라도 떨어집니다”라고 곧이곧대로 털어 놓으면 브로커는 으레 내가 원가부터 부풀려서 부른 것으로 알아들었다. ‘이번에는 남들 하듯이 많이 붙여 보리라’ 작심을 해도 흥정이 붙으면 내 속을 다 털어 보여 주는 바람에 잘하면 본전치기, 잘못하면 밑지고 파는 헛장사를 되풀이했다.
따지고 보면 꼭 고지식해서 실패한 것만도 아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한몫에 크게 사들여 쌓아 놓았다가 시기를 보아 가격이 올랐을 때 팔아 큰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나는 고작해야 한두 덩어리 사들이고는 얼른 팔아 넘겨서 조금이라도 이윤을 남기려고 전전 긍긍했으니 애초에 승산이 없는 일이었다. 그때의 면사 수입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주식 투자와 이치가 비슷했다. 나는 여윳돈이 없어서 장기투자가 불가능한 개미투자자 처지였다.
아무튼 젊어서 그런 경험을 해 본 덕에 나는 그 이후 남이 무슨 일로 아무리 큰돈을 벌었다고 해도 그게 내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니다 싶으면 쳐다보지도 않는 버릇이 생겼다. 밑지고 골머리 앓기를 몇 차례 되풀이하다 보니 그만 장사에 넌덜머리가 났다.
거짓말도 조금씩 섞어가며 장사하는 재주를 도저히 익힐 수가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다시 공장을 차려서 골머리 앓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생활을 계속할 것인가, 두 가지를 놓고 저울질을 거듭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가격 흥정에 머리 쓰는 것보다는 기계와 씨름하는 게 그래도 속이 편하다는 결론에 이르자 지체 없이 제조업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제조업도 그냥 맨손으로 시작할 수는 없는 일, 날마다 복마전이 벌어지는 제일은행 옥상과 동대문시장을 오가며, 창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목돈을 쥐게 될 때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적성에는 안 맞았지만 장사 운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지 오퍼상 생활 몇 해 만에 제조업을 시작할 기반을 어느 정도 닦을 수 있었다. 동시에 도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길이 열린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