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출기 한 대로 시작한 삼영화학...

경남 고성이 고향인 친구 한 사람이 부산에서 미진화학이라는 플라스틱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 공장만이 아니라 그 당시 우리나라 주요 플라스틱 공장은 모두 부산에 있었다. 럭키화학, 청강산업, 동신화학이 그들이다. 특히 동신화학이라면 나이 50대 이상의 부인들은 거의 다 ‘동신 스펀지’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브래지어를 만들어서 큰돈을 벌었던 회사이다.

당시는 플라스틱 사업이 신소재 산업으로 장래성이 있어 보였다. 사출기 몇 대를 들여 놓고 플라스틱 바가지, 컵, 양동이 등을 생산했는데 가볍고 깨지지 않아 인기가 좋았다. 좋은 아이디어로 신상품을 계속 만들어 내면 수요를 무한히 창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지고 있는 돈으로 우선 서울에 방 한 칸짜리 작업 공간이라도 빌려서 사출기 한 대 들여 놓고 시작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문제는 사출기 구입이었다. 기계 수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존 플라스틱 업자들이 플라스틱 제조업을 정부의 ‘노후화 대체 기계 도입 정책’ 적용 대상에 포함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오래 되어 낡은 기계를 새 기계로 바꿀 경우에만 기계 수입을 허가한다는 것이다. 나처럼 새로 공장을 차릴 사람은 아예 기계를 들여올 방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기존 업자들끼리만 그 시장을 나눠먹겠다는 속셈이 아닌가? 선발 업체들의 신규 사업자에 대한 진입 장벽은 이토록 발 빠르고 집요했다. 기존 업자 중 누군가가 상당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법규가 강자의 이익만을 보호하고 있을 때, 약자에게는 편법밖에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친구에게 협조를 구했다. 상대는 미진화학 이상봉 사장이다.

“미진화학 명의로 사출기를 한 대 수입해서 내게 임대해 줄 수 없겠나? 서류상으로만 그렇게 하자는 이야기다. 기계 값은 내가 치른다.”

▲ 1959년 11월 부친 회갑 기념사진. 앞줄 왼쪽으로부터 본인, 아내, 부친, 큰아들, 모친

친구 입장이라 차마 안 된다는 말이 안 떨어졌는지, 그 친구는 허락을 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마음을 바꿔 거절통보를 해왔다. 이 친구의 도움이 없으면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검사로 있던 그 친구의 동생에게까지 달려가서 사정을 했다.

“상진아, 형하고 나 사이 알지 ? 너희 형이 사업이 조금 돌아간다고 나한테 이럴 수 있냐? 내가 정당하지 못한 일을 무리해서 추진할 사람도 아니고, 다만 법 자체가 올바르지 않은 현실이니 내 사정 좀 봐달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너희 형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손바닥 뒤집듯하고 있다. 네 생각은 어떠냐?”

결국 친구 동생이 친구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책상만한 이탈리아제 플라스틱 사출기 한 대를 들여왔다. 서울 제기동에 50평 넓이의 창고를 빌려서 플라스틱 제조업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 친구 형제가 없었더라면 나는 플라스틱과 인연을 맺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해 뒤인 1959년에는 영등포구 영일동 오비맥주 공장 앞에 비로소 200평 터를 잡아 공장다운 공장을 차렸다. ‘삼영화학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제기동 창고 시절이나 다름없이 나는 공장장이자 상품 기획자였고 디자이너이자 판매원이었다.

내 집에서 쓰는 살림살이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생활용품 중 산뜻한 플라스틱 제품으로 탈바꿈시켜 소비자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늘 궁리했다. 지금까지 쓰고 있는 왕관 모양의 삼영화학 상징 로고도 내가 영등포 공장 초기에 직접 만든 것이다.

당시는 유리 공업이 무척 빈약했다. 시장 통 선술집에서 참새구이에 소주 한 잔 하면서 닳고 닳은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는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소주잔을 내가 한 번 바꿔보리라.’

공장으로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번 기회에 소주잔만 아니라 크기 별로 컵을 디자인해서 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소주잔부터 5홉짜리까지 크기 별로 세 종류를 디자인했다.

‘무슨 색을 써야 술 맛을 돋울 수 있을까, 그린라이트 색이 좋겠다.’

그러나 그린라이트는 당시로서는 국내 안료로는 만들 수가 없어 독일에서 안료를 수입했다. 제작 원가의 상승 요인이 되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료를 조합하고 하루 종일 기계를 돌려 컵을 뽑아냈다. 그 중에서도 흠 없이 잘 만들어진 것만 고르고 또 골라내서 책보에 싸 들고 동대문시장으로 갔다. 요샛말로 하자면 ‘시제품 프레젠테이션’이다.

6.25 전란 통에 다 깨지고 남아난 게 별로 없던 시절에 서민에게 제일 다급한 것이 그릇이었다. 그런 이유로 전쟁 후에 동대문시장에서 그릇장수가 제일 먼저 기반을 잡았다. 그 이래로 시장통의 좋은 길목은 대개 그릇장수가 차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