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플라스틱 컵 한 번 받아보시겠습니까? 신제품입니다. 조금 받아서 팔아 보시고 반응이 괜찮으면 제가 계속 대겠습니다.”
당시에는 그릇 장사를 하는 여자는 드물어서 40~50대의 퉁명스러운 남자들을 상대로 마케팅을 해야 했다. 나로서는 야심작인데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는 식이라 속으로는 몹시 마음이 상했다. 그러나 맡기고 가는 어미 심정으로 ‘잘 좀 봐 달라’고 허리 굽혀 인사하고 돌아다니며 여러 점포에 물건을 깔았다.
공장에 돌아오면 컵의 윗부분에 빙 돌아가며 동그라미 무늬도 넣어 보고, 물결 모양의 무늬를 내기도 했다. 풍요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만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궁핍한 시대에도 사람들은 모양이 좋은 것을 선호하고,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영원한 진리다.
디자인이 적중해서 컵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주문이 밀려들었다. 원료를 조합해 넣으면 20초에 한 번씩 두서너 개의 컵이 나왔다.
‘한 번에 열 개, 스무 개 쏟아내는 대형 사출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공장의 굼벵이 사출기들로는 많이 뽑아 봐야 하루에 2~3천개가 고작이었다. 주문은 그 수량을 훨씬 웃돌았으니 입이 바싹 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기계가 그리 더딘 줄을 그때 알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내가 디자인한 제품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물건이 달리니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이 수금이 척척 잘 됐다. 이렇게만 계속 일어나라.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961년 5.16 후에 쿠데타 주체들에게 가장 시급한 현안은 급격하게 줄어든 미국의 경제 원조를 다시 늘려 받아내는 것이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에 가서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을 만났던 것도 미국의 우려와 불신을 해소시켜 미국으로 하여금 돈주머니를 다시 풀게 할 필요성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 얼마 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씨도 미국으로 날아갔다. 대통령의 동생인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가 자기 집무실에서 책상에 발을 얹어놓은 채 김 씨를 맞이했다는 일화가 당시 한국의 처지를 잘 말해 준다. 쿠데타에 성공했다고 불씨도 없이 어떻게 냉골을 데울 것인가? 빈손으로는 민생 안정도 경제 개발도 요원한 일이니 미국을 향해 달러 구걸 외교도 불사해야 할 형편이었다.
조그만 제조업체 사장인 나도 사업이 궤도에 오를수록 달러 가뭄을 실감했다. 플라스틱 제조업은 원료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데, 자금이 있다고 원료 수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워낙 달러가 귀하다 보니 정부에서 배정해 주는 한도 내에서만 수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원료 확보에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경제기획원에서 미국의 경제 원조자금 중 40만 달러를 협동조합에 배정해 주면 열대여섯 개나 되는 고만고만한 업체들이 서로 한 푼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그 배분에 넉 달, 다섯 달이 훌쩍 흘러가기도 했다. 선풍기 돌릴 철에 고기 한 점 갖다 놓고, 어떻게 나눠 먹을지 결정 나기만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난로 땔 철이 돌아오는 식이었다.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목 빼고 기다린 결과도 기대에 못 미쳤다. 대기업에 5만 달러 정도 배정될 때 삼영화학에 돌아오는 몫은 고작 5천 달러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제조업체가 얼마나 성장하느냐는 원료 수입 능력에 달려 있고, 원료 수입 능력이란 달러를 배정받는 능력에 달려 있구나. 그렇다면 원조 달러 배정만 바라보고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필요한 만큼 원료를 수입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뚫어야겠다.”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때 마침 정부가 재일교포 재산 반입 허용이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일자리는 부족했고 사업 환경도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고국에 돈 보따리 싸 들고 돌아올 교포가 얼마나 된다고 그때까지 그런 규제를 해왔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해방이후 지속됐던 재일교포 재산 반입 규제가 그때 비로소 풀렸다. 신격호 회장의 롯데그룹처럼 이를 계기로 고국에 진출한 기업도 있지만, 아직은 고국으로 들어와 사업을 할 생각을 하는 교포들이 별로 없었다. 정부에서는 규제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세제 혜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재산 반입 권장책을 써서 교포 기업인들의 자본을 국내로 유입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해 당사자가 아니면서도 정부의 이 정책을 유심히 연구해 보았다. 내 현안이 원료 확보이고 원료는 일본에도 있었으므로 어떤 묘책이 이 정책 안에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과연 거기에 묘책이 있었다. 재일교포 한 사람의 협조를 얻어 재산 반입의 형식을 취하면 정부가 배정해 준 달러 규모에 얽매이지 않고 원료를 수입할 수 있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