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업만 더 크라는 법이 어디 있나.
규모가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작부터 대기업인 회사는 세상에 없다"
나는 즉시 일본으로 떠났다. 내게 명의를 빌려줄 교포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도쿄를 거쳐서 오사카에 열흘 이상 머물며 동분서주했다. 도쿄라면 길을 좀 알지만 오사카는 동서남북도 가리지 못할 만큼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알음알음으로 교포 사회를 헤집고 다닌 끝에 드디어 요긴한 정보를 얻어냈다.
“아사히 플라스틱이라는 이름의 플라스틱 재생 공장을 경영하는 분을 찾아가 보세요. 제주도가 고향인데, 형편이 안 좋은 고향 노인들과 자주 왕래한다고 들었소.”
그 분을 만나서 찾아온 목적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더니 조용히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어떤 건물의 2층으로 안내했다. 10여 명의 재일동포 노인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만난 한 노인이 내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내 제안에 응해 주었다. 나는 200톤 가량의 원료를 구입해서 그 노인 명의로 들여올 수 있었다. 200톤이면 그때로서는 굉장히 많은 물량이다. 그 노인의 짐처럼 꾸려서 함께 귀국하지 않았다면 엄두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오사카에서 막연히 헤매던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아사히 플라스틱 사장은 그 일이 인연이 되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서로 각별하게 교류했다. 그러나 50대에 요절해서 무척 마음이 아팠다. 내게 잠시나마 원료 수입의 숨통을 터주었던 정부의 재일교포 재산 반입 권장정책은 2년 정도 지속되다가 원래 의도했던 효과를 별로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1962년에 다시 화폐개혁이 있었다. 1953년에 ‘환’으로 바뀌었던 돈의 단위가 10년 만에 ‘원’으로 되돌아오면서 돈의 가치가 10대 1로 평가 절하되었다. 두 번의 화폐개혁 시점에 대한 내 기억이 이다지도 선명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첫 화폐개혁으로 바꾼 돈 두 뭉치를 들고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 생활을 시작했고, 두 번째 화폐개혁 직후에는 플라스틱 제조업에서 결정적인 도약의 발판을 내딛게 됐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에 손을 댄 지 4년 만의 일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정보통이라고 믿어지는 사람 근처에 매일 서성거려 봐야 별 무소득인 반면에, 전혀 뜻하지 않은 기회에 뜻하지 않은 사람을 통해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사업이란 그런 것이고, 더 나아가 인생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철도청의 침목개량 사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바로 그런 것이다.
내가 거래하던 한일은행에 가면 이따금 마주쳐서 낯을 익힌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은행에서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눈이 둥글둥글하고 큼직한 그 사람은 고향이 울산이고 이름은 김상순이라고 했다. 본디 시멘트 관계 사업을 하다가 PC(Prestressed Concrete) 침목을 제조해 철도청에 납품하는 일에 손을 댄 참이라고 했다.
침목은 기차 레일을 고정시키고 충격과 소음을 흡수하는 부분이다. 재래식 침목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당시 철도청에서 재래식 침목을 시멘트로 바꾸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시멘트 침목의 정확한 명칭이 PC 침목이다. 충격에 잘 견디도록 강화한 콘크리트를 PC라고 하는데 여기에 철근을 박아서 PC 침목을 만드는 것이다.
서로 눈인사나 나누던 처지에 우연히 말문이 터져 이러한 자기 사업 관계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주더니 그가 불쑥 이런 제안을 했다.
“플라스틱 공장을 경영하신다니 말씀인데, 부품 공급을 하실 생각이 없습니까? 침목의 중요한 부품인 플라스틱 볼트를 대기로 한 인화실업이라는 업체가 있는데, 여태껏 볼트를 생산하지 못해서 계약서에 정해진 철도청 납품 기한이 지나 애만 태우는 중입니다.”
듣자니 침목과 레일을 잇는 부분에 쓰는 볼트는 소재가 플라스틱이긴 한데, 우리 공장에서 쓰는 원료와는 다른 특수 수지를 써야 했다. 달랑 두 대인 사출기에 특수 수지를 부어 볼트를 만들어 내려면 일반인 상대의 플라스틱 생활용품 생산은 중단해야 했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대단히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는 사업상의 기로였다.
‘철도청 사업이라니 수주 물량은 상당한 규모일 것이다. 동대문시장 납품에 견줄 일이 아니다. 그러나 판로가 확보되어 있는 생활용품 생산을 접었다가 만일 볼트 납품일이 삐끗하면 어떻게 하나?’
나보다 서너 살 연상의 김상순 씨는 볼트 공급자가 절실히 필요한 입장이었고 오래 겪어본 사람은 아니어도 내게 믿음을 주었다. 사업을 할 때 결정적인 순간에는 ‘감’으로 결정을 내린다. 며칠 심사숙고 끝에 나는 볼트 생산을 맡기로 결단을 내렸다. 특수 수지 10톤을 주문하고 원료가 도착할 때까지 볼트 금형을 만들었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그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기계를 열심히 돌려서 김상순 씨에게 볼트를 넘겨주었다.
알고 보니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인화실업은 애당초 플라스틱 소재로 볼트를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철도청에 제공한 기업이었다. 그러니 침목 개량 사업의 주체인 철도청으로서는 인화실업을 버리고 우리와 새 계약을 맺기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납품 약속을 거듭 어겨 사업의 진척을 가로막고 있는 인화실업을 더 이상 기다려 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철도청은 제 3자인 삼영화학의 존재를 묵인하는 선에서 일을 추진하고 싶어 했다. 삼영화학의 납품을 문제 삼지는 않겠으니 PC 침목 생산자와 삼영화학이 알아서 직거래를 하라는 것이었다.
철도 레일의 규격은 모두 통일되어 있어서 볼트 생산은 단순 균일 생산 작업이다. 서류에 도장 한 번 찍지 않은 관계였지만 볼트를 넘기면 곧바로 돈을 받았다. 엉겁결에 시작한 일인데 현금이 아주 쏠쏠하게 들어왔다. 애써서 개발만 해놓고 뒷감당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인화실업 대신에 알토란같은 일감이 내 차지가 된 셈이었다.
‘이 관계가 계속 유지만 된다면 3~4년 안에 기반을 잡겠다. 경부선 침목만 다 교체한다 해도 그 물량이 얼마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