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남몰래 환호작약(歡呼雀躍)한 것도 잠깐, 모 대기업이 달려들었다. 볼트 수주를 특정 사업자가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니 일정 수준의 시설 규격을 갖춘 플라스틱 업자들이 공개경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신화학이 여기에 합세했다. 철도청은 굵직굵직한 플라스틱 회사들의 항의를 감당할 수 없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럭키, 동신, 미진뿐만 아니라 ‘오케이 치약’으로 유명했던 청강산업까지 쟁쟁한 플라스틱 회사들과 삼영화학이 나란히 시설 심사를 받았다.
사출기가 럭키와 동신은 각각 열두 대, 청강은 일곱 대, 미진이 다섯 대인데 우리는 달랑 두 대였다. 그것도 그들 기계보다 용량이 작은 5, 6톤짜리였다. 게다가 인화실업도 뒤늦게 생산 능력을 갖추고 최초 아이디어 제공자로서의 기득권을 행사하고 나섰다. 그러니 결과가 뻔한 싸움이 아닌가?
“인화실업이야 도의상 내가 뭐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돈이 된다 싶으니까 뒷짐 지고 구경만 하던 큰 업체들이 이제 와서 딴소리를 걸어오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경쟁에서 진다면 삼영으로서는 통탄할 일, 일단은 젖 먹은 힘까지 다해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무엇인가, 갑자기 사출기를 열 대로 늘릴 것인가, 큰 공장을 빌려 이사를 할 것인가, 삼영화학이 비록 시설 규모는 작아도 기술과 신용 면에서는 결코 큰 회사에 뒤지지 않음을 관계자들에게 인식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사업으로, 인간관계로 맺어진 인연을 총동원하여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SOS를 쳤다.
“이제까지 나무랄 데 없이 납품해 왔는데 시설 경쟁에서 뒤져 밀려난다면 중소기업이 설 땅은 대체 어디냐”고 호소했다. 남에게 좀처럼 하기 싫은 아쉬운 소리를 하고 돌아다니려니 속으로는 죽을 노릇이었다. 그러나 양심을 거스르는 청탁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속으로나 자신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큰 기업만 더 크라는 법이 어디 있나. 규모가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작부터 대기업인 회사는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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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영화학 청주 공장 / 직접 디자인한 왕관 모양의 상징도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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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발이 닳도록 사람들을 만났고, 허리를 굽혔다. 불광동에 사는 모 인사의 집을 숱하게 찾아갔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혜화동 우리 집에서 불광동까지 가려면 아스팔트 포장이 끝나는 홍제동부터는 자갈길을 달려야 했다. 그때가 한겨울이라 눈이라도 내린 뒤에는 왕복 네 시간 이상 걸렸다. 문전박대 당하기를 열 번 만에 그 집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결과가 나왔다. 철도청에서는 잡음을 없애려고 그랬는지 최종업자를 선정해서 수주 배당량까지 명백히 못 박아 발표했다. ‘인화실업 15만 개, 럭키화학 7만 5천 개, 삼영화학 7만 5천 개’천하의 동신, 미진, 청강이 다 떨어져나갔는데 삼영화학이 살아남았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 보았다. 사람 일에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듣도 보도 못한 회사가 플라스틱 업계 최강자와 같은 양의 수주를 따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럭키화학이 승복하지 않았다. 끝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인화실업과 삼영화학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바로 원가 경쟁이었다. 큰 기업이 덤핑 공세를 펼쳐 오니 규모가 작은 나머지 두 회사는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덤핑 가격의 원가 계산서를 작성해서 자기들은 그 가격으로 재협상을 하겠다고 조롱 반, 위협 반으로 들이댔다. 나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남이 씹어 넘겨서 위장 안에 들어가 있는 음식물이라도 맘만 먹으면 쇠갈퀴로 빼내갈 사람들이로구나. 큰 기업이 더 커지는 비결이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나는 이익 다툼을 떠나서 인간에 대한 비애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인화실업 수주 분량에서 5만 개, 삼영화학 수주 분량에서 2만 5천 개를 덜어내서 럭키화학에 몰아줌으로써 사태를 해결했다. 럭키화학이 15만 개 수주로 제1 수주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인화실업 10만 개, 삼영화학 5만 개로 수주량이 줄어들어 가슴이 쓰렸다. 그래도 판을 깨는 것보다는 그게 나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고비를 넘겼다 했더니 어느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나타났다. 동아건설이 플라스틱 볼트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특허를 낸 것이다. 철 볼트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결국은 럭키고, 인화고, 삼영이고 철 볼트에 밀려나고 말았다. 플라스틱 볼트 생산 3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3년 동안에 석 달 열심히 기계를 돌리면 기계 한 대 값이 떨어질 만큼 재미를 보았다. 공장을 키우는 일에는 무척이나 신중한 나도 이때만큼은 이익금을 부지런히 모아 설비 투자를 하였다. 처음에 기계 한 대 들여 놓을 때의 마음은 ‘반찬값이나 제대로 벌어 보자’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공장을 키워나가는 재미에 몰입하게 되면서 어느새 플라스틱 사업은 나의 천직이 되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