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에 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수출 진흥에 힘쓰면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섬유산업이다. 오로지 값싼 인건비가 경쟁력인 개발도상국에서 믿을 수 있는 산업으로는 섬유업이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해방 전부터 섬유업의 중심이었던 대구에서는 섬유 도매상들이 정부의 섬유업 육성책을 등에 업고 활발하게 공장을 지었다. 섬유업이 짧은 기간에 내수 위주의 보따리장수에서 수출 산업으로 급성장했다.
그 당시에 부산 출신인 김만중 씨의 삼도섬유, 호남제분 이용구 사장이 대전에 세운 전진섬유, 개성 출신인 이중영 씨가 마산에 세운 마산섬유가 선발 업체들이다. 1960년대에 시작하여 1970년대까지 이들을 위시한 수많은 섬유 회사들이 대구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이 효과를 발휘하여 역점 수출 분야의 우선순위가 바뀌기 전까지는 섬유업이 줄곧 대한민국 제1의 수출 산업자리를 지켰다.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한번은 전진섬유의 이용구 사장이 나를 찾아와 불쑥 말을 꺼냈다.
“포장지 문제를 삼영화학에서 해결해 줄 방법이 없겠소?”
상황을 들어 보니 혀를 찰 노릇이었다. 수출품을 규격에 맞게 포장해서 선적해야 하는데 국내에는 적당한 포장재가 없어 일본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사카에 있는 공장에 주문을 넣으면 이쪽에서 원하는 상호를 인쇄한 포장재를 만들어 보내주었고, 그것을 받아야 비로소 포장하여 선적을 한다고 했다. 그러니 주문한 포장재가 제때 입고되지 않으면 수출할 내용물은 있으나 포장을 하지 못해 납기를 못 지키는 불상사가 자주 생긴다고 했다.
“미국 섬유시장은 거의 다 유태인이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은 지독합니다. ‘딜리버리’가 한 번 늦으면 무조건 대금에서 10퍼센트씩 깎으니, 수출업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지요.”
딜리버리란 납품 기한을 이르는 영어 ‘Delivery’를 의미한다. 수출업자에게는 ‘딜리버리가 목숨과도 같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납기를 지켜야 하는데, 내용물은 국내에서, 포장재는 바다 건너 일본에서 생산하다 보니 자칫 삐끗하면 피 말리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나보다 아홉 살이나 위인 이용구 사장은 삼영화학에서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타개책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정부에서는 수출 진흥이라는 구호만 외칠 뿐, 수출할 상품을 포장할 포장재조차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상황을 외면하고 있었다. 포장재 생산 능력도 갖추지 못한 수출 한국이라니, 얼마나 공허한 구호인가, 절로 개탄이 나왔다. 나는 국가가 풀어 주지 못하는 섬유업자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즉시 일본 도쿄 출장길에 올랐다.
일제 시대에 함경남도 흥남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를 건설했던 노구치 준이라는 일본인 사업가가 있었다. 조선전업 사장으로 있으면서 총리 관저, 반도호텔, 시청 앞의 시공관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에 세워진 굵직한 건물들을 두루 소유했던 거대 자본가였다. 그는 일본 제1의 화학회사인 ‘짓소컴퍼니’의 소유주로, 내가 포장문제로 담판을 지어야 할 회사가 바로 그 계열사인 ‘짓소엔지니어링’이었다. 무작정 도쿄의 짓소엔지니어링을 찾아간 나는 어렵사리 교섭에 성공했다. 그 회사의 기계 두 대를 한국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45밀리미터 구경 압출기 한 대, 65밀리미터 구경 IPP 기계 두 대를 국내에 들여왔다. IPP 필름이란 현재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쓰레기봉투 정도에 해당하는 포장재다. 지금 와이셔츠를 그런 봉지에 넣어 판다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섬유 산업 초창기에는 그 필름을 확보하느냐 못하느냐에 와이셔츠의 수출 여부가 달려 있었다.
이런저런 기계 부품들은 필요할 때마다 도쿄로 날아가서 내가 직접 가지고 왔다. 내가 김포공항 세관에 기계 부속을 많이 들여오는 사람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35~40킬로그램짜리 부품을 양 쪽에 하나씩 들고 들어온 적도 있었다. 장정 한 사람을 번쩍 들고 들어온 셈이다. 돌아보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다. 도쿄행 비행기는 주 2~3회밖에 없었다. 한 번 출국하면 당장 필요한 부품들을 한 번에 다 들고 들어와야 시간과 돈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몸을 사릴 여유도 없었다. 포장재가 국내에서 생산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주문이 빗발쳤다. 그로부터 한 해 반 뒤, 우리의 기계는 열세 대로 늘어났다. 사업적으로도 대성공이었다.
어떤 사업이든지 새 분야를 개척하여 해당 시장에서 기선을 잡는다는 것은 통쾌한 일이고 수익이 보장되는 일이다. 이용구 사장은 자신이 답답하고 다급해서 나를 찾아온 것이었지만, 나는 그가 털어 놓은 고충에서 직감적으로 새 시장을 내다보았다. 수요는 팽배해 있으나 공급이 전혀 없다. 이는 돈을 벌어다 줄 것이 확실한 아이템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나 구할 수 있는 포장재가 국내에서 생산된다면, 품질에서 큰 격차가 없는 한 국내 생산자에게 주문이 고스란히 옮겨오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사업의 기회는 언제나 이렇게 불쑥 찾아온다.
그러나 잘 되는 사업은 머지않아 후발 주자의 추격을 받게 되는 것도 세상사에 정해진 이치다. 내가 가진 지략과 협상력을 동원하여 짓소엔지니어링으로부터 기계를 처음 들여오기까지가 힘들었지만, 일단 국내에서 설비가 가동되자 여러 업자들이 다투어가며 포장재 생산에 뛰어들었다. 공장 기계 돌리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 기계 설비나 설계에 관해서는 비밀 유지에 한계가 있다. 얼마 안 되어 국내에서 후발 업자들이 가동하는 기계만도 30대 이상으로 늘어났다.
몇 년 후 오사카의 인쇄업자들이 짓소엔지니어링에 몰려가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한국에 납품할 포장재 주문이 밀려들 때는 그 포장재에 들어갈 상호를 인쇄해 주는 일거리도 상당해서, 그 관계 인쇄업자들도 덩달아 재미를 보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짓소엔지니어링에서 한국에 기계와 기술을 이전해 주는 바람에 일본 쪽으로 주문이 오지 않아 자신들도 인쇄 일거리를 놓쳐버리게 됐다며, 분한 마음에 짓소와 대판 싸움을 벌이려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얼마나 이득을 보고 손해를 보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적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은 수출에 필수적인 포장재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삼영화학이 수출 촉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알맹이에 더 신경을 쓸 때라 일반 소비자들은 포장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디자인 포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포장 산업이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이제는 폴리프로필렌 수지를 원료로 한 필름 생산 분야에서 CPP필름, BOPP필름, 콘덴서용 축전 및 절연 필름인 캐파시터 필름에 이르기까지 삼영화학은 국내 필름 기술을 첨단화하여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