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정교육재단을 설립한 후 장학 사업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이름이 익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감사 편지를 받았다. 그 사람은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학교 교수로서 학창시절 집안 형편상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웠지만 내가 보내 준 장학금에 힘을 얻어 더욱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고, 지금은 후진을 양성하는 교수로 성장하였다는 사연과 함께 그 옛날 받은 장학금 증서를 동봉해 왔다.
박한일 교수라고 이름을 밝힌 편지를 통해 ‘저는 편모슬하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회장님이 주신 장학금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회장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약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서도 고마운 마음에 글을 올립니다’고 당시의 심정을 표현했다.
그는 마산고등학교와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영국 런던대학에서 조선 해양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최근 제6대 한국해양대학교 총장에 선출되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이 또 있다.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정옥근 장군이 그러하다. 그 역시 장학금을 지급받고 열과 성을 다하여 매진한 덕분에 장군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감사의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 외에도 정중히 감사의 편지를 띄운 사람이 많았지만, 일일이 그 이름을 다 거론하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편지들을 읽으면서 아득히 잊고 있었던 젊은 시절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모교 후배들을 위하여 내가 뿌린 작은 씨알이 열매를 맺은 것을 보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장학 사업을 계속 추진해야겠다는 결의를 더욱 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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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한일 교수가 보내온 장학금 증서 (글씨가 얼룩진 것은 그 당시 수해로 집안이 물에 잠겼기 때문이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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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로 평소 내가 생각해 왔던 국가관이랄까, 민족관이랄까를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누구나 함부로 쓰는 어휘가 되었지만, 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말을 특별히 좋아한다. ‘의무를 다하는 귀족’이란 의미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가져야 하는 사회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베풀며, 권력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어야 할 사회적 책무가 있다는 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 말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초기 로마 시대 고위층들이 사회에 대한 봉사나 기부 헌신을 명예로운 의무로 인식하고 가치 있는 도덕적 전통으로 삼았던 것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귀족층의 헌신과 희생, 이들의 투철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세계 최강 로마제국을 이끄는 리더십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천 년 동안 천하를 호령한 로마제국의 갑작스런 멸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사라지면서부터였다고 입을 모아 주장한다. 왜냐하면 국가의 근본 요소인 개인의 행복, 사회의 안정, 국가의 발전이 섬김과 나눔의 전통,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뤄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이룬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겉으로야 화려하지만, 막상 그 이면을 보면 계층 간의 갈등, 부익부 빈익빈 현상 등 여러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한편으로 대한민국은 성장만큼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고대 로마 시대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서도, 쇠락의 길이 아니라, 부강의 길을 걷기 위한 최고의 해법은 ‘섬김과 나눔’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사람이 없다.
나는 귀족도 아니고, 권력을 가진 특권층도 아니다. 다만 일찍이 기업에 올인한 삶을 곁눈질 하지 않고 매진해 오면서 남보다 돈을 더 벌었다는 사실 외에는 내놓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그것을 사회에 내놓아, 나름대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해 나갈 따름인 것이다.
다섯째로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 나는 합성수지 가공용 기계를 사기 위해 유럽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귀국 길에 스위스를 방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라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3분의 1도 안 되고, 인구도 6분의 1밖에 안 되는데 국민총소득은 우리보다 10배가 넘고 1인당 국민소득은 40~50배나 되지 않는가? 우리나라처럼 천연자원도 별로 없는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그 비결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사람이 열쇠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사람도 자원이기는 하지만…….
산업혁명을 완성한 유럽 제국들이 국력을 키우고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인재를 길러낸 데 그 원인이 있다. 이들을 일찌감치 본받은 일본도 명치유신 이후 교육제도의 확충과 우수한 선진과학기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세계 강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지 않았는가?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지름길은 우수한 인재들을 잘 교육시켜 과학기술의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앞으로 기업 활동을 통해 많은 이익을 창출해 내면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조건 없이 투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