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창한 플라스틱 사업의 기반 위에서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국제전선이라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선 공장을 세운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자세히 털어 놓겠지만 나는 국제전선을 나의 의지와는 달리 정치 권력의 개입에 의해 다른 기업에 넘겨주어야 했다.
당시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 나이가 막 50대로 접어들었을 때 겪었던 5년 동안의 풍파였다. 거기에서 벗어나고 나니, 이 나라에서 사업할 기분이 안 났다. 정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도 컸다. 그러나 인생살이가 원래 그렇지만 특히 나처럼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실패한 과거에 연연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짓은 없다.
패배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하지 않았는가? 성공이나 실패는 사업가에게 그야말로 상사(常事), 늘 일어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성공했을 때 교만하지 않고 실패했을 때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뜻하지 않은 좌절을 새로운 도전의 밑거름으로 삼기로 했다. ‘내가 누군가, 오기 하면 이종환 아닌가’ 주먹을 불끈 쥐고 스스로 각오를 다졌다.
‘이 나라에서 가장 힘든 사업이 무엇인가? 아무도 엄두를 못 내는 분야를 개척해서 권력에 당한 설움을 씻고 내 이름 석 자를 남겨 보리라.’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넘볼 수 있는 분야에 뛰어들었다가 다시 권력과 부조리의 희생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불가능은 없다고 도전하던 당시의 모습도 할 수 없는 신천지로 뛰어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나는 젊었고, 나 자신을 믿었다.
한일협정의 타결로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차관 외에 2억 달러의 상업차관을 받았을 때 그 중 450만 달러가 배정된 산업이 있었다. 바로 애자 산업이다. 당시 과연 누가 애자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했기에 상업차관에 그만한 액수를 배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그 자금으로 국내에서 애자 산업에 시동이 걸렸다. 그 일을 처음 맡은 사람은 일본에서 공부한 재일동포였다. 그러나 그는 애자 생산에 끝내 성공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든 사업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애자산업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사업 준비를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위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먼저 도전한 사람이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고 하니 오히려 의욕과 기운이 더욱 솟아났다.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로구나. 그 어려운 거 어디 내가 한 번 해 보리라. 흙으로 하는 사업에는 정치도 간섭을 못할 것이다.”
애자 산업도 전기 관련 산업이라 국제전선 5년 동안에 알게 된 그 분야 정부 부처 사람들, 또는 사업 관계자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만류했다. “전선에 손댔다가 5년이나 갖은 고생을 했는데 어쩌려고 또 애자 사업에 손을 대느냐”고 말렸다. 그러나 나는 어려우면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어려웠다. 처음에는 5년 정도 바짝 달라붙으면 애자라는 난제를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5년은 눈 깜빡할 사이에 흘러갔다. 결국 무려 30년의 세월을 애자 산업에 바쳐야 했다. 그러나 분명 값진 세월이었다. 내가 세운 대한민국의 고려애자가 세계에서 네 번째로 초초고압 애자를 생산해 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국내 애자 수요를 100퍼센트 감당하는 것은 물론 해외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니 30년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애자란 무엇인가? 전신주를 올려다보며 유심히 관찰한 사람이라면 떠올릴 수 있는, 전신주에 매달려 있는 전기 절연물이다. 배전 선로용 소형 전신주의 라인 포스트 애자에서부터 거대한 송전탑에 매다는 초고압, 초초고압 애자까지 있다. 흙으로 빚어서 자기처럼 섭씨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낸다. 초초고압 애자의 경우, 애자 하나가 수십 톤의 엄청난 전선 무게를 견뎌야 한다.
고려청자를 굽는 도공은 가마에 칩거하며 몇 백 개의 자기를 구워서 그 중 한두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다 깨버리는 고행에 가까운 창작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홀로 체득한 노하우와 예술가적인 감식안으로 행해지는 예술 행위이다. 그러나 애자는 예술품이 아니라 고도의 정밀함과 견고성이 요구된다. 동시에 불량률을 최소화해서 대량생산해야 하는 공산품이다. 노천에서 비바람, 햇빛 등에 노출된 채 매달려 있어야 하므로 습기를 흡수해도, 염분에 약해도, 고열에 팽창해도, 초저온에 금이 가도 안 된다.
애자에 요구되는 기술의 핵심은 자기에 핀을 고정시키는 과정이다. 쉽게 말해서 모자 모양으로 구운 자기의 정수리 부분에 핀을 박는 기술이다. 고온에도 늘어지지 않게 열처리한 엄지손가락만한 핀을 자기에 박은 후 특수 시멘트를 부어 고정시킨다. 핀과 자기의 접합에 들어가는 시멘트 반죽이 불과 죽 한 숟가락 분량밖에 안 된다. 그만큼 정교한 작업이다.
기술적으로 한번 완벽하게 접합되면 10톤 트럭 다섯 대를 걸어서 잡아당겨도 핀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 된 게 아니다. 그만한 하중을 받아도 자기에 균열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감당해야 하는 최대 하중의 몇 배수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애자를 만들어 내야 안전을 자신할 수 있다.
이 기술을 정복하는 데 25년 세월을 바쳤다. 때로는 주력 기업인 삼영화학에 너무 소홀하다 싶을 정도로 애자 개발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러일전쟁 때 일본의 한 제철학자가 자기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전쟁이 난 줄도 몰랐다더니 내가 바로 그랬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애착이 커지고 기술 개발에 몰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