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검증하고 또 검증해서 완벽한 제품을 출고했다. 그러나 전신주에 매달린 상태로 품질보증 연한을 다 채우지 못하고 금이 가거나 심한 경우 깨져서 전신주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불량품이 생겨날 때는 정말 피가 마를 노릇이었다.
지금은 한여름 에어컨 가동으로 전기 사용량이 일시적으로 급등하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전 사고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전기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듯 저절로 공급되는 걸로 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전 사고가 잦아서, 집집마다 불이 나갔을 때에 대비해서 양초 한두 통은 상비해 두고 살았다. 문제는 전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대형 빌딩들이다. 정전 대비 시스템이 변변히 갖춰져 있는 데가 드물던 시절이다.
복구까지 몇 시간 정전 사태가 이어지면 건물 전체의 기능이 마비되고 만다. 수술실을 비롯해서 각종 긴급한 진료가 이루어지고 있는 병원과 생산 라인이 돌아가고 있는 공장에서는 한전으로 항의 전화가 빗발친다. 횟집 사장이 죽은 고기가 둥둥 뜬 어항을 싣고 한전 지점장실로 쳐들어가는 해프닝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전선의 품질은 나아지고 있는데도 정전 사고가 잦은 것은 상당 부분 불량 애자 때문이라는 것이 한전 측의 주장이었다. “물건을 엉터리로 만들었다, 이익을 크게 남기려고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이 쏟아질 때는 정말 억울했다. 아무리 완벽을 기해도 불량률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아 애간장이 다 탔다. 생산자의 고통을 몰라주고 그저 시정의 악덕업자 취급을 하며 몰아세울 때는 상대방이 야속하기도 했다.
‘애자를 몰라서 그래. 모르니까 그리 모질게 욕을 할 수 있지, 내가 조금 참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실 한전 수리반원들이 현장에 달려가서 전신주마다 오르내리며 원인 규명을 위한 점검을 해 보면 애자 불량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제조업체로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애자로 인한 정전 사고가 한 건 발생할 때마다 한전 직원 3만 명이 고려애자를 비난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 불량품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한전 사람들의 원성이 드높아서가 아니라, 난제를 겁 없이 덥석 붙들었으면 끝장을 봐야 했다. 성공도 실패도 아닌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답보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용납이 안 됐다. 내가 애자에 손을 댔을 무렵에 이미 이웃 나라 일본은 애자 생산에 100년 이상의 노하우와 전통을 쌓고 있었고 중국의 애자 산업 경력도 80년이나 됐다. 대한민국의 애자 역사 원년은 1978년, 바로 내가 마산에 공장을 짓고 애 자라는 난제를 붙든 해로 보아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애자 산업에 뛰어들었을 때 아무도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다 할 기술이 축적되어 있지 않은 군소 회사들이 좁디 좁은 애자 시장에 난립하여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을 하고 있었다. 웬만한 애자는 수입해서 충당하고 있었기에 주문 물량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신규 기술 투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영세한 실정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국내 시장 수요가 워낙 적으니 무작정 공장마다 적은 물량을 위해 가동할 것이 아니라 서로 순서를 정해 격년으로 생산하고, 나머지 시간은 기술 투자와 품질 개선에 쓰자는 제안을 했다. 동종 업계 협의 모임을 만들어 함께 발전해 나가자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국내 애자 시장 규모 자체를 키우는 데 합심하지 않으면 나도 죽고 상대방도 죽는다는 상황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나의 노력이 국내 애자 시장 규모를 키우는 데에 나름대로 밑거름이 됐다고 자부한다. 한편으로 고려애자만의 기술 개발을 위한 끝없는 연구와 개발도 긴 세월 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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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애자의 특고압 애자 개발과 생산에 대한 기사 (매일경제 1983.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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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나긴 연구에 마침표를 찍어준 것은 원료 배합 노하우였다. 신비의 점토 배합률을 찾아냈을 때는 마치 보물섬의 지도를 찾아낸 선장처럼 감격에 휩싸였다. 점토를 반죽할 때 특정 성분을 첨가하고 그 배합률을 준수하니 2.5센티미터 두께의 애자에 50톤 무게의 전선을 달아도 절대 빠지지 않는 초강력 애자가 만들어졌다. 아직 ‘특정 성분’이라고밖에 밝힐 수 없다. 원료를 공장에 입고할 때조차도 그 성분에 대해서는 절대 비밀에 부친다. 배합률도 극비사항이다.
물론 배합률과 특정 성분이 비결의 전부는 아니다. 그 동안 축적해온 최첨단의 기술과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결정적인 노하우를 획득해서 적용했다 하더라도 극적인 효과를 발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고려애자 20여 년 만에 765KV 용량의 송전용 초초고압 애자의 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28년 만에 불량률 제로에 가까운 제품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자기 애자메이커로서 일본과 함께 세계 시장에서 겨루게 됐다.
요즘 젊은이들 표현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애자 기술력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까지의 어려웠던 과정에서 국가적인 지원이 전혀 없는 현실을 원망하기도 했다.
정치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믿어 애자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애자 산업이야말로 국가가 지원하고 육성해야 하는 분야라는 생각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국제전선으로 쓴잔을 마신 뒤라 국가 이익에 기여한다는 드높은 대의명분을 앞세우지는 않았어도 고려애자는 기간ㆍ동력 산업 기자재의 국산화 측면에서 국가적으로 긴요한 존재라고 나는 자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