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화 초창기에는 한국전력이라는 유일한 납품처에 납품을 하기 위해 군소 애자 업체 몇몇이 덤핑으로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을 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결국 기반이 부실했던 다른 애자 업체들은 대부분 도산하고 삼영화학을 모체로 한 고려애자만이 홀로 살아남아 꿋꿋하게 기술 투자를 거듭했다.
마침내 1985년에는 거의 수입에 의존하던 애자를 상당 부분 국산화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전까지는 일본이 자기 애자 시장을 지배했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었다. 이제 고려애자가 수준급 애자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일본도 마지못해 애자 가격을 이전의 50퍼센트 수준으로 낮춰야 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한전에서 국제 경쟁 입찰 방식을 도입하는 바람에 또 다시 고전해야 했다. 중국, 일본과 우리나라의 애자 업체를 나란히 경쟁시키니, 중국의 저가 공세를 당해 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오로지 단가가 싸다고 해서 그런 애자를 수입해 쓰면 결국 국내 기업은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내 애자 산업체가 모두 문을 닫게 되면 그때 가서 외국 회사들이 가격을 많이 올려도 어쩔 수 없이 외국제품을 사야 한다. 일본이 애자 시장을 독점하던 시절, 우리는 그들의 횡포를 충분히 겪은 바 있다.
품질 좋은 애자는 전력 공급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기자재이다. 때문에 한전에서는 한때 애자 공장을 직접 짓는 복안까지 마련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시설 투자와 고용, 개발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했다. 그 대신 국산 애자 상품의 가치와 품질 향상에 골몰하고 있는 고려애자 같은 기업을 육성하는 데에 조금만 힘을 더 실어주었다면 애자 기술 정복의 과정이 더 단축됐을 것이다.
자기 애자의 난제를 완전히 풀었다고 쾌재를 부를 무렵에 국제 애자 시장에는 ‘폴리머 애자(Polymer Insulator)’가 등장했다. 총기 소유가 자유화되어 있는 미국에서 총으로 쏘면 잘 깨지는 자기 애자의 대체품으로 이 합성고무 애자를 개발해 냈다. 해가 갈수록 폴리머 애자의 점유율이 높아졌다. 자기 애자를 주로 사용하던 동남아와 유럽에 서도 폴리머 애자를 선호하는 추세이다.
자기 애자는 무겁고 깨지기 쉬워 다루기가 힘들지만 폴리머 애자는 가볍고 튼튼해서 쉽게 다룰 수 있다. 무엇보다도 원가가 자기 애자의 절반 이하이니 가격만으로 경쟁한다면 자기 애자가 폴리머 애자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애자는 그 나름의 강점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우선 수명이 폴리머 애자에 견주어 훨씬 더 길다. 그러므로 당장 단가가 싸고 공사비용이 적게 든다고 해도 길게 보면 폴리머 애자가 결코 경제적인 선택이 아니다. 교체 비용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이다. 또 교체된 폴리머 애자의 폐기에 따른 환경오염 가능성도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돈이 적게 드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때문에 국가 기간 시설과 관련된 결정에서는 코앞보다는 멀리 내다보고 득실을 따지는 지혜가 필요하다.
수백억 원을 쏟아 부어 마침내 개발한 자기 애자의 국제적 수요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 수요도 급감 추세이니 그 노력이 결과적으로는 헛고생이 된 것인가. 폴리머 애자 쪽으로 완전히 전환해서 자기 애자의 수요 급감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지난 30년 세월 끝에 오늘의 고려애자를 세웠다. 소재의 재빠른 전환이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폴리머 애자로 시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납품 받는 입장에서는 무한 경쟁 시대이니 폴리머 애자에 대응하려면 자기 애자도 가격을 낮추라고 한다. 그러나 폴리머 애자와 가격경쟁을 하기로 든다면 자기 애자는 어차피 밑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다. 팔수록 손해나는 제조업이라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애자 산업에 바친 30년 세월, 대한민국 땅의 송·배전선에는 자그마치 3,500만 개의 고려애자의 애자가 걸려 있다. 마산의 한 구석에 공장을 세우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내려가 생산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면서 애자에 바친 내 열정과 공력이 국토 전역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국가 동력.기간 사업에 기여했다는 자부심과 보람은 그 어떤 경제적 성과와도 비교할 수 없다. 자기 애자가 영구성 면에서 폴리머 애자보다 월등히 낫다는 결론이 내려질 시기가 빨리 올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있다. 애자는 반영구적이어야 하는데 폴리머 애자는 개발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아 그것이 완전히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어 우리가 북한에 전기를 공급하는 시대가 열린다면, 그리고 역사적 대북 송전을 위한 설비에 값은 싸지만 환경오염 가능성이 있는 폴리머 애자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기 애자를 써야 적격이라는 주장을 누군가가 한다면, 한반도의 나머지 절반에 깔릴 애자 생산을 위해 자기 애자의 모든 생산 라인이 다시 활기차게 돌아가는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그런 앞날을 기대해 본다. 이러한 기대가 애자 기술에 몸 바친 한 노장의 꿈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고려애자는 기업 인생에서 미래 예측이란 얼마나 복합적인 것인가를 화두로 던져 주었다. 아직도 나는 이 화두를 붙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