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의 일이다.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중대발표를 했다. 박 대통령 주도 하에 1962년부터 실시된 두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소비재 산업의 기틀을 어느 정도 다진 데 이어 1972년부터 ‘제3차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중화학공업만이 살 길’이라는 새로운 기치를 내건 것이다.
언론에서 그러한 대통령의 발언을 자주 보도했다. ‘중화학공업 입국(立國)’이 국가적인 어젠다(Agenda)가 됐다.
더욱이 당시는 1969년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의 책임’이라는 미 닉슨 독트린이 선언된 뒤였다. 1971년 미 지상군 2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이 철수했다. 같은 해 박 대통령의 자주국방선언이 나왔다. 이어 1972년 10월에는 유신이 단행됐다. 1973년에는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이 발표되고 방위산업육성을 위한 율곡계획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주국방이나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 육성과 맞물려 돌아갔다. 그러나 그해 10월에는 제1차 오일쇼크가 불어 닥쳤다. 국내외 상황은 그만큼 절박하고 숨가팠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돌파구는 중화학공업 입국밖에 없고, 우리나라 경제발전단계에서는 그만큼 절실하고 미래지향적이며 타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중화학공업 입국에 발맞추기 위해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때까지 13년간 플라스틱 공장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충분한 경제적 기반을 나름대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
중화학공업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면 무엇보다도 동력이 중요하다. 동력이 갖춰져야 기계를 돌릴 것 아닌가? 사람으로 치면 전기는 피와 같고 전선은 핏줄과 같다. 나름으로 그런 결론을 내리고 1972년 전선 사업에 뛰어들었다. 막상 큰 결심을 하고 사업을 추진했지만 내가 선발 주자는 아니었다.
양대 기업이 전선 시장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금성전선(LG전선의 전신이고 지금은 LS전선으로 바뀌었음)이요, 또 하나는 대한전선이었다. 따라서 나의 결정이 무모한 도전이라며 주위에서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길게 보아 3년에서 5년 정도 열심히 하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그들을 능가하는 설비의 전선 공장을 세웠다.
사업 계획으로, 기술 혁신으로 그들을 이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에 깨달았지만 이것은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순진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었다. 이 전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복병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미처 몰랐다. 그 대가로 그 후 5년 동안 금성전선, 대한전선, 공화당 이렇게 세 공룡과 전쟁을 치르는 데 내 인생의 황금기를 허비해야 했다.
든든한 배경이나 정치권력이 없는 사람은 도저히 배겨 낼 재간이 없을 만큼 강하고 집요한 압력이었다.
솔직히 지금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만으로도 피눈물이 나려할 만큼 안타까운 사연이다. 재단 설립을 결심한 후 많이 나아진 줄 알았는데 또 그때 일을 말하려니 심장이 뛰는 것을 숨길 수 없다. 그럴수록 이야기를 여유롭게 시작하고 싶다.
일제 때 전라북도 군산에는 왕자제지라는 거대한 종이 공장이 있었다. 왕자제지는 지금도 제지 공장 중에 세계 1, 2위를 다투며 일본 내에서 단연코 1위 자리를 지켜온 대기업이다. 당시 군산에 지은 제1 공장 말고도 이북의 길주와 신의주에도 공장이 있었다. 군산 공장의 터가 13만 평이나 됐으니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흥남 질소비료 공장을 제외하고는 가장 넓은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인으로 조선 땅에 그렇게 큰 부지를 잡아서 공장을 차린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왕자제지라는 일본 기업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기업이 우리 땅에 남기고 간 군산 공장의 가이스카 향나무에 관한 이야기다.
가이스카 향나무는 일본 품종의 향나무로 식물도감에 오른 이름으로는 ‘나사백’인데 그냥 ‘가이스카’라 부르기도 한다. 근래에는 일본 종이라고 해서 인기를 잃었으나 예전에는 소나무보다 더 쳐 주던 조경수(造景樹)였고, 가로수로도 많이 심었다. 왕자제지는 군산에 공장을 지으면서 그 공장 둘레에 담장을 따라 가이스카 향나무를 심어 놓았다.
해방 후 군산의 왕자제지도 주인이 바뀌었지만 가이스카 향나무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위용을 과시했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 날 그 공장 앞을 지나친 적이 있는데 한겨울 짙은 초록의 침엽수들이 흰눈과 어우러져서 빚어낸 설경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잠자고 있던 내 낭만적 감성을 툭 건드려 깨우는 듯했다. 사람이 한눈에 반하듯이 내가 그만 그 향나무에 반해버렸다.
‘입은 옷을 벗어 팔아서라도 한 그루 사다가 내 집 뜰에 심어 두고 바라보고 싶구나!’
내 안에는 언제나 이러한 낭만이 잠재하고 있어, 한 폭의 절경 앞에서, 한 그루 빼어나게 잘 생긴 나무 앞에 서면 마음이 소년처럼 뛴다. 그리고 그 기억이 놀라울 만큼 오래도록 내 가슴 한 귀퉁이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나이 오십에도 그랬고,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오늘에도 다름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