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에 전선 공장을 짓던 중 불현듯 그 가이스카 향나무가 생각났다. 곧바로 군산으로 달려갔다. 공장 주인에게 나무를 모두 내게 팔라고 부탁을 했다. 헤아려 보니 모두 160그루가 넘었다. 흥정이 잘 되어 나무들을 모두 ‘제무시’(미국 제너럴 모터스 회사에서 만든 GMC 4륜구동 트럭을 다들 ‘제무시’라고 불렀다. 도요타의 ‘도락구’ 트럭도 있었지만 당시 가장 힘 좋은 운송 차량으로는 ‘제무시’를 꼽았다.) 트럭으로 실어 안양의 2만 5천 평 공장 터 나들목에 줄지어 심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그토록 탐냈던 가이스카 향나무가 내 공장 나들목 300미터에 도열을 해서 나를 반기니 공장을 드나들 때마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마치 내가 왕자제지 주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뜻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대한민국 최고 규모와 설비로 전선 공장을 완성했으나 공장을 돌릴 수 없었다. 앞서 말한 기존 양대 전선업체의 집중적인 로비를 받은 정부에서 공장을 돌리도록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지킬 수 없는 조건을 달았다. 선진국과 기술제휴를 해서 해외 판로를 확보해 놓아야 허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규 업자가 공장을 가동도 하기도 전에 즉 아무 실적도 쌓기 전에 해외 수주부터 받아야 한다는 것은 공장을 돌리지 말라는 것과 다름 없는 말이다.
막막했지만 정부가 내건 조건을 어떻게든 충족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야 했다. 하지만 기술제휴를 위한 여러 시도는 알 수 없는 기기묘묘한 이유로 번번이 난관에 봉착하여 불발로 그쳤다. 정부에서 국제전선의 기술도입 신청서는 절대 승인해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히고 있었던 게 아닌 이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공장 허가가 나지 않는 이유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문제를 풀어 낼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등산 장비도 없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에 서서 정상을 멍하니 바라보아야 하는 등반가의 심정이 그럴까?
당시 많은 기업들이 외국 자본을 유치해서 공장을 세웠고, 정부에서는 외자 유치를 적극 권장했다. 다만 외자도입법에 따르면 그러한 기업의 생산품은 극히 일부만 내수로 돌릴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수출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내 기억에 마산의 이젠백 맥주 공장이 바로 그러한 조건으로 공장을 세우고는 수출길이 막혀 가동 불능상태가 된 것으로 안다. 그렇더라도 나는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나는 외자에 한 푼도 의존하지 않고 외자도입법에 저촉되지 않는 공장을 세워 설비를 갖췄다. 1972년 8・3조치(사채에 시달리는 기업들을 돕기 위해 정부가 전격적으로 사채 동결을 명한 조치) 전 에 한국에는 그렇게 큰 공장이 없었다.
훗날 생각을 해 보니 공장 설비 단계에서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았었다. 그때 돈으로 25억 원을 들여서 공장 설비를 들여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상공부에서 각 은행 외환 창구에 ‘앞으로 전선 기계의 도입은 100퍼센트 수출을 전제로 할 경우에만 허용한다’고 통보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알아차렸다.
‘아, 이것은 정부가 나더러 전선 사업에 끼어들지 말라는 소리구나. 뒤에 누군가 있다.’
제3공화국 정부 관료와 밀착되어 있던 기존의 양대 전선 회사가 당시의 제도와 법규를 총동원하여 국제전선이라는 신규 업체를 상대로 끝없는 진입 장벽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참 떠나온 길이라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계속 일을 추진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장을 완공해 놓았더니 이번에는 상공부가 외자도입법을 들먹이면서 외환은행을 앞세워 국제전선의 숨통을 죄어들어 왔다. 그 압력에 그냥 나동그라질 수 없었다.
어느 날 중앙청으로 달려갔다. 당시 상공부 장관은 그 이전에 건설부 장관도 지낸 장예준 씨였고, 내가 찾아간 사람은 박필수 상역차관보였다. 속으로는 정부의 처사에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가득해도 애써 평정한 낯빛을 유지하면서 상역차관보와 면담을 했다. 어찌 됐든 나는 돌파구를 찾아야 할 약자의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