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상역차관보는 대한민국 무역의 보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진흥에 몹시 힘썼던 터라 무역 관계 현안을 두고 거의 매일 상역차관보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서 지시를 할 정도였다. “오늘 수출은 어떤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 세계 무역 동향과 대책을 묻고 지시하는 ‘각하’의 전화를 거의 매일 직접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실권자였다.
상황이 그러하니 그가 상공인들을 대할 때에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 날도 그 사람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이유를 들먹이며 노골적으로 국제전선에 대해 마땅치 않은 심기를 드러냈다. 기존 전선업자의 편에 서서 국제전선 문제를 재단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고위 공직자란 말인가?’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눈 감아 달라고 찾아간 것이 아니라 우리는 법을 저촉한 바 없으니 원칙대로 해달라고 소명하러 찾아간 터였다. 대체 대한민국의 법은 어디 있고, 원칙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외자 도입 없이 공장을 건설했으면 외자를 도입한 공장보다 수출 경쟁력이 결국 더 커질 것이 아닌가?
이런 저런 논리를 들어 설득해 봤지만 우이독경(牛耳讀經),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속에서 불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동안 쌓인 감정이 한 순간에 폭발했다.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탁자에 놓인 재떨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서슬이 퍼런 유신 체제 하의 관청에서 백주에 그런 행동을 했으니 이만저만한 만용이 아니었다.
그러나 용렬하게 살아오지 않은 나다. 이쯤 되면 그저 내 성질대로 대처할 뿐이다. 그간 내게 가해졌던 보이지 않는 권력의 비열한 폭력에 견주면 이 정도쯤이야 폭력 축에도 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제전선과 관련한 나의 무용담 아닌 무용담은 또 있다. 내가 무슨 용기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시대가 어떠했던가를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어서 빼놓을 수 없다.
공장 기계는 당장 돌릴 수 없어도 원자재는 확보해 놓고 싸워야 했다. 그러나 공장이 난항을 겪으면서 그 자금이 돌지 않았다. 우선 2천만 원 정도 대출을 받아 자재 값에 충당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외환은행에 우리 회사 무역부장을 보냈더니 ‘대출 불가’ 판정을 받고 돌아왔다. 6개월 이상 적금을 넣어야만 돈을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 공장을 가동할 수 있을지 앞날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600여 명 종업원에게 임금을 계속 주고 있었다. 적금을 넣어 대출을 받으라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1973년 10월 1차 오일쇼크 이후 청와대가 나서서 ‘담보 능력이 충분할 때는 자재 구입용 대출에 적금을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도록 하라’면서 기업 우호적인 발표를 했다. 그러나 일선 현장의 상황은 이렇게 판이했다. 과연 어떤 기업이 청와대 발표의 혜택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공장 규모가 상당했던 국제전선이 주거래 은행인 외환은행에
서 대출을 거절당했으니 더 말할 것이 없지 않은가? 금성전선, 대한전선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또 국제전선 공장을 담보로 최소한 20~30억 원은 대출받을 수 있는데 당시 우리는 그 절반밖에 대출받지 못했다. 그것도 나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되도록 빚지지 않고 사업하는 게 내 원칙이기에 국제전선이 그런 답답한 지경에 처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만한 대출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대출 문제로 전전긍긍하고 있던 그 날 고려원양의 이학수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려원양의 모태는 광명인쇄공사로 알려져 있는데 5·16 때 목숨 걸고 혁명 공약과 포고문의 인쇄를 맡았던 곳이다. 민간인으로서 쿠데타에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이후 정부 간행물을 도맡아 인쇄하는 특혜를 입으며 날로 사업을 확장했다. 혁명 정부의 후원으로 고려원양을 세워 원양어업계의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 회장의 부인이 평안도 출신으로 내 아내와 평양 서문여고 동기인 것이 인연이 되어서 이 회장과 비교적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누구를 좀 대접해야 하는데 이 사장도 꼭 좀 와 주시죠.”
그날 오후 5시쯤에야 전화로 저녁식사에 나오라는 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마침 퇴근 후 별다른 일정이 없었기에 약속 장소로 갔다. 장소는 회현동의 회림이라는 요정으로, 당시 정·관계 실력자들이 많이 드나들던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