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업원들이 나를 맞아 그곳 2층에 있는 큰방으로 안내했다. 이학수 씨 옆에는 외환은행장인 김우근 씨가 직원 몇몇을 데리고 나와 있었다. 큰 술판이었다. 회림의 대리 주인 백 마담도 자리에 있었다. 일본 청주가 몇 순배 돌아가는데 외환은행장이 대뜸 국제전선 대출 건을 화제에 올렸다.
“담보 능력이 있는 기업은 대출 편의를 충분히 봐 주라는 지시가 청와대에서 내려오긴 했습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내 입장을 말했다.
“기업인들 사정을 헤아린 현명한 조처입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국제전선의 경우 6개월 은행에 적금을 넣은 다음 수입 원자재 대금을 상환할 수 있는 대출을 허용한다면 시간상 절대 불가능한데, 그 방법이 아니어도…….”
“그렇게 싫으면 다른 은행으로 거래를 옮기면 될 거 아니오?”
그렇지 않아도 그 장소에서 외환은행장을 마주치자 낮에 보고 받은 외환은행 일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술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던 터에 그 말을 듣자 속이 확 끓어올랐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남의 술자리인데 내가 참아야지.’
어렵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10여 분을 화장실에서 서성거리다가 술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김 은행장에게 한 잔 권했다. 그랬는데 김 은행장이 얼굴을 외면한 채 왼손으로 술잔을 내미는 게 아닌가? 이 무슨 오만불손한 행동인가? 그 순간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견딜 수 없는 모욕감에 나도 모르게 김 은행장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순간 술자리는 아수라장이 됐다. 내가 술자리에 들어선 지 30분 남짓밖에 안 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후 주위를 살펴보니 언제 자리를 떴는지 모조리 도망을 가고 오로지 심 차관 한 사람만 남아서 나를 붙들고 말렸다. 그 와중에도 내가 한마디 했다.
“행장이 얻어맞으면 끝까지 싸움을 말려야 도리인데 말리는 행원은 한 사람도 없고 죄다 도망가기 바쁘니 참으로 딱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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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6 취지문을 인쇄한 안국동 광명인쇄소에서. 왼쪽부터 김용태 정보부장 고문, 이학수 광명인쇄소 사장, 김 부장, 이낙선 최고회의의장비서관 / 이학수 씨가 마련한 술자리에서 나는 대출건으로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은행장에게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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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기업에 어떤 경우라도 공정해야지, 기업 탄압의 수족으로 동원되어서야 나라 경제가 무엇이 되겠는가? 게다가 여신(與信)을 무기로 기업인 앞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 하는 것은 무슨 태도인가?
그러나 당시 외환의 90퍼센트를 쥐고 흔드는 외환은행의 ‘장’ 자리는 한국은행 총재 자리에 버금가는 권세를 갖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 들면서 ‘틀림없이 내일 아침에 나를 모시러 올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정보부 아니라 정보부 할애비가 나를 데려가더라도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져 먹었다.
다음 날에 출근하니 아침부터 상공부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빗발쳤다고 했다. 그러나 각오했던 호출은 오후까지도 없었고 심 차관만 몇 차례 전화로 나를 달래며 공연히 애를 태웠다. “나를 봐서라도 김 행장에게 사과를 좀 해 주시죠.” 차관까지 나서는데 내 고집만 내세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은 오후 3시경 외환은행으로 가서 행장을 만났다. 내가 사과를 할 이유는 없었으나, 중재에 나선 심 차관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간밤의 상황을 얼추 봉합은 시켜야 했다. 그걸로 주먹다짐 건은 일단락됐다. 바위에 계란 치기로 끝날지언정 수많은 기업가 위에 군림하던 은행장에게 경종을 울린 결과가 됐다고 속으로 위안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박정희 정부 시대 수출 드라이브와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힘입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급성장한 수혜자가 있는 반면 그 뒤안길에서 이렇듯 불이익을 당하며 발버둥쳐야 했던 희생자도 있었다. 공정하지 못한 관계 당국의 처사에 반발하여 내가 옳은데, 아무 하자가 없는데 왜 공장 허가가 나지 않느냐고 아무리 외치고 버텨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국제전선은 버티다 버티다 결국 ‘100퍼센트 수출만 하겠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으면 공장을 가동하도록 허락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답답한 마음에 도장을 찍었다. 그것이 얼마 안 가서 내게 족쇄가 될 줄은 당시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