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수주를 따지 못해 600여 명 공장 직원들이 손 놓고 지내는 피 말리는 상황은 예상보다도 훨씬 길어졌다. 이럴 때 사장의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던 중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난국 타개의 실마리가 찾아오는 듯했다. 이 이야기 또한 앞서 말한 가이스카 향나무에서 시작된다.
국제전선 공장은 삼성이 운영하던 안양골프장 입구에 있었다. 안양골프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종종 찾아와 운동을 하던 곳이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이 골프를 치려고 안양골프장으로 들어가다가 국제전선 공장 나들목에 늘어선 가이스카 향나무에 시선이 꽂혔다. 워낙 일본통이었으니 박 대통령이 가이스카 향나무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골프가 끝난 뒤 안양골프장 사장 이병철 씨와 식사 중에 박 대통령이 잊지 않고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이 사장, 골프장 입구에 들어선 공장이 무슨 공장입니까?”
“제 고향인 의령 출신 젊은이가 열심히 사업을 해서 국제전선이라는 이름으로 큰 전선 공장을 지은 걸로 압니다.”
“내가 보니 아주 잘 지었소. 특히나 공장 나들목 조경이 참으로 장관입디다. 내가 아주 탄복을 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국제전선 공장에 관심을 기울였을 때, 사업가적인 머리가 비상한 이병철 회장은 겉으로 내색을 못 해도 아마 속으로는 ‘옳다, 됐다!’ 하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 사정 이야기가 또 간단치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이병철 회장과 고향이 같다고 해서 뭔가가 있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내가 전선 사업을 시작했을 때 이미 양대 전선 회사가 우리나라 전선 시장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야기했다. 그 양대 회사 즉 금성전선과 대한전선은 전선뿐만 아니라 가전 분야에서도 강력한 맞수로 피 말리는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전선이 1위, 금성전선이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양상이었고 여기에 이병철 씨가 뒤늦게 뛰어들었다. 동경 출입이 잦았던 이 회장은 앞으로 한국에서도 가전(家電)이 유망하다, 전자 쪽에 진출해야 한다는 정보를 많이 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산요와 합작을 해서 ‘삼성산요 공장’을 세웠다.
당시 금성전선 창업주 구인회 회장에게는 공화당이라는 큰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대한전선의 창업주 설경동 회장 또한 자유당 때 이승만 박사 밑에서 재정부장을 지낸 이래 재력과 정치력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들이 자기 텃밭에 뛰어든 제3의 기업을 가만히 두고 바라볼 리 없었다. 결국 삼성산요는 그들의 압력에 못 이겨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이병철 씨는 아니었다.
산요와 결별한 후 그는 삼성전자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내걸고 가전분야에 더욱더 강력한 재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즈음에 내가 국제전선을 시작했고, 이병철 씨가 전자 분야에 진출하면서 겪었던 고초를 내가 겪고 있었으니, 그의 숙적이 나의 숙적이 된 셈이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은 국제정치뿐만 아니라 일국의 산업체 내에서도 딱 들어맞았다.
이병철 씨는 금성전선과 대한전선 견제에 나의 국제전선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박 대통령이 국제전선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했다.
박 대통령이 국제전선 공장 나들목에 있는 향나무를 바라보며 탄복을 했다는 사실을 회식에 동석했던 이병철 씨가 일부러 전화해서 전해 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내게 그날의 대화를 아주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나로서 가장 반가운 이야기는 마지막에 나왔다.
“그래서 말이오, 국제전선 공장에 대해 각하께서 말씀이 계셨소. 지금의 국제전선 상황을 타개하도록 선처해 주실 듯 하니 내게 공장 내역을 상세히 적어 보내시오.”
청와대에서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언질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격식을 갖추어 서류를 꾸렸다. 국제전선이 중화학공업 입국이라는 국가시책에 부응하여 세워진 건실하고 탄탄한 기업이며, 국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청사진을 가지고 있음을 대통령이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어떠한 불합리한 규제가 국제전선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지도 자세히 밝혔다.
박 대통령이 안양골프장을 다시 찾을 때 이병철 씨를 통해 그 서류만 건네받게 되면 이제 국제전선의 억울한 사정을 헤아려 공장 가동을 위한 조처를 내려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그 날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았다. 서류가 시원찮아서도 아니고 박 대통령이 그 서류를 검토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전선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 박 대통령이 안양골프장 출입 자체를 끊어버렸고,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서류들은 그대로 안양골프장 사장 서랍에 묻혀버렸다.
일을 틀어버린 것은 그 날의 배석자였다. 박 대통령과 이병철 씨가 국제전선 문제를 화제에 올렸을 때 박 대통령을 수행했던 고위 인사가 서울로 돌아가 그 내용을 금성전선 측에 전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이 국제전선에 호감을 가지고 사업을 지원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기득권자들 진영에 파다하게 전해졌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 고위 인사는 머리 회전이 여간 빠른 사람이 아니었다. 누설의 장본인이면서 박 대통령에게는 거꾸로 “각하와 골프장 사장 사이에 오간 이야기가 관계 기업들에 금방 새나가는 걸 보면 그 골프장의 보안에 문제가 있습니다”라며 안양골프장 출입 자체를 만류했다. 측근에서 보좌하는 그가 보안 문제를 들고 나오는 데야 대통령이 굳이 안양골프장 걸음을 고집할 이유가 있었을까?
치밀한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애초에 안양골프장에 각하 전용 특별실과 욕실을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이병철 사장이 “이 정도 시설이면 충분하다, 따로 각하를 위한 특별 시설을 만들 만한 장소가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대통령으로 하여금 안양골프장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해서 아예 스스로 발을 끊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런 곡절 끝에 국제전선에 관한 박 대통령과 안양골프장 이병철 사장의 대화는 거기서 멈춰버렸다. 더 이상의 진전은 영원히 없었다.
나의 대리전을 통해 삼성의 적들을 물리치려 했던 이병철 씨의 기대도 물거품이 됐고 나 또한 일장춘몽을 꾸었을 뿐이다. 하긴 평생 권력의 덕을 보는 일과는 거리가 먼 내가 아닌가? 전선 사업으로 새로운 도약을 꾀했던 나의 청사진이 무참하게 구겨짐을 당하는 형국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 했으나 그조차 기어이 훼방 놓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