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선에 대한 압력은 갈수록 극심해졌다. 공장을 내놓고 전선사업을 포기하면 모종의 반대급부가 있을 것이라는 회유도 받았다. 그러나 나는 타협하지 않았다. 아니 타협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중앙정보부까지 개입했다. 상황은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면의 사연은 생략된 채, 나는 그저 분함을 못 이겨 은행장에게 주먹을 날리고 관청에서 재떨이나 내던지는 물불 안 가리는 중소기업인으로 간주됐다. 그러니 누가 내 일신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는가? 신변의 위협을 느낄 만큼 공기가 수상했다. 결국 나는 망명하다시피 이 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나라 밖으로 떠돌면서도 나의 집념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반드시 해외 수주를 따서 공장을 정상화하고 대한민국 제1의 전선업체로 우뚝 서도록 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언제 어느 곳에 머물러 있더라도 국제 입찰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았다.
마침내 팔레비 국왕 치하의 이란에서 기회가 왔다. 이란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전기통신 인프라 구축 사업이었다. 국내 실적이 전혀 없었지만 다행히도 서류 심사에서 자격 요건보다는 실질적인 생산 능력을 우선적으로 검토해 준 덕분에 어렵사리 입찰자격이 주어졌다.
일본, 캐나다, 미국, 스페인, 유고슬라비아에서 쟁쟁한 전선업체가 입찰에 참여했다. 일본에는 당시 7개의 전선회사가 있었는데 그 중 스미토모를 비롯한 막강 기업 세 곳이 경쟁적으로 참여했다. 모두 십여 개 기업이 총력전을 벌이는 살벌한 국제 입찰전쟁이었다.
국제전선은 420만 달러에 일을 따냈다. 쾌재를 불렀다. 50여년이 지난 오늘날 가치로는 5억 달러를 넘는 것이었다. 공장 설립을 둘러싸고 겪어야 했던 온갖 시름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러나 짜릿한 기쁨도 정말 단 한순간으로 끝났다. 2등이 580만 달러를 써냈다는 것을 안 순간, 낭패감으로 내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2등 뒤로는 600만 달러, 700만 달러짜리가 이어졌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가.’
다른 경쟁에서야 압승이 가장 통쾌한 결말이겠으나, 입찰 전쟁에서는 압승이란 무의미하다. 상대방을 넉넉히 따돌리는 게 아니라 아슬아슬하게 이길수록 쾌거다.
치밀한 사전 조사와 수면 아래서 벌어지는 불꽃 튀는 눈치작전 그리고 결정적 직관으로 경쟁사를 단돈 몇 푼 차이로 눌러 이기는 게 입찰 경쟁에서의 묘미다. 160만 달러 차이로 입찰을 따냈다는 것은 화살이 과녁에 꽂히긴 꽂혔으되 명중은커녕 겨우 빗나가기만 면한 셈이었다. 이는 살벌한 국제 입찰 전쟁이었다.
‘160만 달러라……. 100만 달러라도 얼마나 큰돈인데……. 내가 왜 이리 머리를 못 썼나, 자타가 공인하는 나의 직관력도 이제는 녹이 슬었단 말인가?’
꼭 수주를 따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나치게 가격을 내린 게 화근이었다. 뒤늦게 내 손가락을 깨물고 싶었다. 밤에 자려고 누워도 극심한 낭패감에 잠이 오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날이 밝았는데도 후회에 잠겨 있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일이 결정되고 나면 뒤돌아보지 않는 내 성미하고도 맞지 않았다. 이제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가자고 각오를 다졌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번 일에서 이익까지 보려 했나? 기계 설비 다 갖춘 공장에서 600명 직원이 일이 없어 손 놓고 2년째 놀고 있다. 이제 수주를 땄으니 어쨌든 기계는 돌리게 되지 않았는가? 이번 수주의 의미는 상황 타개다. 잘 했다, 꼭 해내야 한다.’
이렇게 심기일전하고 있던 터에, 이전에 이란에 전선을 수출했다는 일본의 쇼와(眳和) 전선 쪽에서 연락이 왔다.
“수주를 딴 것은 축하합니다만, 조심하시오. 이란의 흰개미는 아주 골치덩어리요. 나무를 다 갉아먹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이야기를 순수한 경험자로서의 충고로 받아들인 나는 화들짝 놀랐다. 대책을 세워야 했기에 서둘러 시공 현장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지시하고 이란의 담당자들에게도 문의했으나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었다. 전선을 갉아먹는다는 흰개미를 단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치열했던 입찰 경쟁의 승자가 한국의 신생업체 국제전선인 것이 배가 아팠던 것인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겠다는 심사인가? 자기들이 수주를 받지 못하게 된 화풀이로 헛된 정보를 던져준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일본 회사로부터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묘한 통쾌감도 밀려왔다.
‘아, 너희도 배 아프니까 별짓을 다하는구나, 일본 사람은 뭔가 별종으로 생각했었는데 우리와 다를 게 전혀 없구나!’
해코지도 질시의 소치인지라, 그러한 해코지를 당하고 보니 오히려 없는 기운까지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엄연한 입찰 전쟁의 승리자라는 사실에 새삼 통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낙찰가에 대한 분한 마음은 싹 털어버리고 서둘러 귀국해서 원가 절감 대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밑지는 수출을 하게 될망정 국제적인 신용이 달린 문제이니 품질은 확실히 책임져야 될 터, 내실을 기하되 손해도 안 보려면 어찌해야 하나? 묘책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한 가지 한 가지 따져나갔다.
동 케이블의 주원료는 구리이다. 구리는 국제 시세가 뻔해서 도저히 가격을 낮출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동 케이블을 싸는 PE절연재 사정은 어떤가? 한국에서는 만들지 못해 일본에서 수입해 오는 자재다. 어쩌면 거기에 원가 절감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본에는 잘 알려진 절연재 제조업체가 두 곳 있었지만, 그 업체들은 대한전선이나 금성전선과 기술 제휴가 되어 있어서 우리와는 거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을 샅샅이 뒤져서 마침내 조건이 맞는 곳을 한군데 찾아냈다. 독자적인 기술 개발로 국가 기준 심사에 합격한 제품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군소업체라는 약점 때문에 일본 내 업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회사라고 했다. 바로 그 회사 사장을 만나서 내가 직접 가격 협상을 했다. 20퍼센트 가격절감에 성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