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가에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한...

두 번째는 도롱태, 즉 동 케이블을 감을 나뭇등걸이었다. 실을 감을 때 실패가 필요하듯이 동 케이블은 나무 도롱태에 감아서 유통시킨다. 원래 나뭇등걸목재를 수입해 쓰는데 그 수입가격이 무척 비쌌다. 그 비용을 줄일 수 없을까 여러 날을 궁리하다가 어느 날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도롱태는 동 케이블을 감는 축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동 케이블의 품질이다. 굳이 새 나뭇등걸을 수입해서 쓸 필요가 있을까? 한 번 쓰고 버려진 도롱태를 수거해 재활용할 방도를 찾아보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주 계약서를 뒤져 보았다. 그 어디에도 도롱태를 꼭 새 나무로 써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다. 전국 각지에 30명이 넘는 직원을 내려 보내 쓰고 버려진 도롱태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선을 감았던 도롱태는 더러 옥외 선술집 테이블로나 쓰였을까, 별 다른 용도가 없었기에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 아마 전국에서 100트럭 분량은 수거했을 것이다. 거기에 페인트칠만 새로 해서 케이블을 감았다. 지금처럼 인건비, 수송비가 비싸면 재활용 비용이 더 들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이 방법으로 원가를 크게 절감시킬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절연지였다. 절연재로 감아 꽁꽁 뭉쳐 놓은 동 케이블 한 가닥을 까보면 수백 가닥, 수천 가닥의 가는 전선이 들어 있다. 그 한 가닥 한 가닥을 일일이 다 절연지로 싸주는데, 이 특수지 역시 일본에서 수입해 썼다. 국내 전선 공장의 주요 거래처는 도모에가와 제지 공장이었다. 이곳 역시 가격 협상은커녕 기존의 거래처와의 관계가 있어서 국제전선에는 납품을 할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차선책은 무엇인가.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마침내 도모에가와 출신 기술자가 조그맣게 공장을 차려 독립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내가 직접 찾아갔다. 공장장이 나를 반기더니 융숭하게 칙사 대접을 해 주었다. 그는 완벽한 품질의 절연지를 생산하고 있으나 역시 거래선을 뚫지 못해 고전 중이었다. 가격 협상은 순조로웠고 나는 절연지를 20퍼센트 싼 가격에 공급받기로 했다.

▲ 도롱태 / 이란 수출 시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나는 헌 도롱태를 수거해 썼다

동 케이블 제조 공정에서 긴요한 세 가지 자재의 원가를 현저하게 절감시키니, 이익은 못 내도 손해는 안 보고 납품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공장만 차려 놓고 정부의 압력에 손 놓고 지냈던 국제전선은 물론 폴리에틸렌 절연재나 절연지 생산업체나 모두 판로 튼튼한 메이저 업체들의 틈바구니에서 살 길을 찾으려고 버둥거리던 비슷한 처지였다. 우리는 마이너 업체 간의 동병상련으로 연대했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요즘 말로 ‘윈-윈’ 하는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 도전하려는 마음만 버리지 않으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돌파구는 뚫린다. 악전고투 중에도 원군을 만나게 되는 법이다. 이란 입찰 때의 경험은 나에게 지치지 않는 불굴의 도전정신을 가르쳐 주었다.

그 뒤에 대만의 가오슝(高雄) 시장이 가오슝 시와 부산시의 자매결연을 맺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안양에 있는 우리 공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는 한국의 전선 공장 시찰을 원했는데, 그 중에서도 금성전선, 대한전선을 마다하고 설비 규모가 제일 크고 가장 잘 되어 있는 국제전선 공장을 보고 싶어 했다. 내가 반갑게 맞이하여 공장을 구경시켜 주면서 헌 도롱태 재활용 아이이어를 귀띔해 줬다.

“헌 도롱태를 수거해서 쓰십시오. 원가를 절감시킬 수 있는 비결입니다. 품질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우리도 그리 해야겠습니다. 소중한 비결을 알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대만에 오시게 되면 꼭 미리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만에 갈 일이 생기지 않아서 그 대접은 이제껏 받지 못했다. 어찌 되었거나, 고사(枯死) 직전에 극적인 해외 수주로 국제전선 공장의 기계들은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란에 납품할 전선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전에 포항제철에 대한 시제품으로 CV 케이블을 한 트럭 분량 생산했다. 그것을 포철에 내려 보내면서 품질을 검토해 보고 합격점을 받을 만한 수준이면 받아 달라고 제안했다.

포철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공급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해 왔다. 훗날 듣기로 포철의 박태준 회장은 국제전선 덕에 제철소 전선 동력 설비비용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그때는 경부고속도로가 막 개통됐을 무렵이다. 케이블을 감은 2미터 넘는 드럼을 자그마치 60트레일러나 실어 수차례에 걸쳐 나를 때 그 출고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울컥 가슴이 복받쳤다. 그 기분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감격적인 장관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더구나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정적에 쌓여 있던 공장인가! 그래, 생산에도 이런 기쁨이 따르는구나!’

속으로 그렇게 쾌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