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문제는 흰개미가 아니라 이란 정부였다. 정부 상대의 계약임에도 불구하고 뜻밖에 신의를 지키지 않아서 오랜 기간 상당히 애를 먹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될 만큼 식언이 잦았다. 이를테면 2~3일 걸리는 신용장 개설에 두 달이 걸리는 식이었다. 수출 완료까지 자그마치 2년이 걸렸다. 잔금 190만 달러를 다 받아내는 데에 얼마나 기운을 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오늘날 이란의 국가 신용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나에게는 이란이 쉽게 믿지는 못할 나라로 각인되어 있다.
그렇게 애써도 해외 수주가 성사가 안 되더니 이란 계약에 이어 시리아에서도 낭보가 왔다. 시리아 군부가 주관한 국제 입찰에 나와 함께 경험을 쌓은 황 부장을 보냈더니 대만의 태평양전선을 제치고 수주를 따낸 것이다. 이번에는 입찰 가격도 좋았다. 220만 달러. 어느 정도 이익이 보장되는 액수였다.
대한전선이 이 국제 입찰에서 우리에게 밀려 패했다는 사실이 불씨였던가? 얼마 안 되어서 시리아 수주를 토해 내라는 압력이 여기저기에서 들어왔다. ‘아니 국내입찰도 아닌 해외입찰에도 정부가 이렇게 개입하나?’ 하는 생각에 이 나라의 정부와 경제를 생각하니 통탄스럽기까지 했다.
‘해외수주가 국제전선의 살 길이고 어떻게 딴 입찰 건인데 경쟁사에 넘기라는 것인가. 절대로 못 준다.’
하도 부대끼다 못해 태국으로 떠나 한동안 지내다가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정보부에서 입국 금지를 시켜놓아 귀국할 수 없는 황당한 지경에 처하기까지 했다. 급기야 ‘시리아 건을 내주지 않으면 그 다음 은 구속이다’라는 협박이 들어왔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신문에 성명서를 게재할 생각까지 했다. 국제전선의 억울한 상황을 널리 알릴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안을 작성하여 동판으로 제작한 다음 광고 접수를 시키려는 데 삼성 산하인 중앙일보만 광고를 내주겠다고 했을 뿐, 조선일보도 동아일보도 광고 접수조차 받지 않았다. 그들의 사정도 이해가 됐다. 신문사들이 사실상 대기업의 광고로 먹고사는 처지, 금성전선이나 대한전선 같은 큰 광고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광고를 받아줄 리 만무했다. 정보부의 압력 또한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국제전선 5년 동안에 ‘정치에는 법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밀려오는 환멸에 나는 마침내 공장을 대한전선과 금성전선에 양도하고 말았다. 덩그러니 공장을 지어 놓고, 국내시장은 물론 국제시장에도 전선을 단 1미터도 더 내놓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제 더 싸울 힘도 없어 결국 내가 접은 것이다. 법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한 기득권자의 승리였다. 신문에서는 이를 ‘정부의 기간산업 조정 정책의 일환’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렸다.
되돌아보면 당시 대재벌 성장의 밑거름이 바로 그런 전선 사업이었다. 내가 그 시장을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끝내 꺾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는 정보통신기술(IT)의 세계적 조류를 타고 더 큰 재벌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경제학자는 아니다. 다만 시장의 상황상 필요할 때는 정부의 개입을 확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케인즈 학파의 근간이라는 것쯤 은 알고 있다. 그리고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는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가 “정부가 기업에 강박을 하지 않는 경제가 시장경제의 요체”라고 한 것과 “정치가 경제를 모두 주도하려고 해서는 결코 공정한 시장경제가 정착될 수 없다”고 한 말에 공감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그 사람이 어려운 이론으로 말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현실로써 이를 체감하고 있었다. 반세기 이상의 산업 일선에서 권력이나 관료들이 작심만 하면 국제전선과 같이 피땀으로 일군 건실한 기업이라도 하루아침에 살릴 수도 또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현실과 이론의 해답은 간단하다. 죌 것은 제대로 죄되 최소한으로 하고 풀 것은 과감하게 푸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공직자 또는 공무원들은 과거처럼 권력의 눈치를 보지 말고 오로지 국민과 나라만을 바라보고 바로 나아간다는 국가관과 사명감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 일반 사람들이나 기업들도 정부에 시정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되 꼭 지켜야 할 것은 스스로 잘 지키면서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할 것이다. 정부, 기업, 개인‐우리 모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래야만 하고 또 이제는 당당히 그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공멸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