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기억 한 토막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1979년의 12·12 쿠데타 및 1980년의 5·17 비상계엄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장군이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무소불위의 기관을 급조해서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공직자 숙정부터 시작해서 언론사 통폐합에 과외 금지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환부를 도려내겠다며 그 위세가 대단했다.
우리 세대 사람들은 박정희 장군이 주도한 1961년의 5·16도 겪었기 때문에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서슬 퍼런 분위기는 5·16 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5·16 때는 워낙 가난해서 이렇게라도 해서 나라가 잘 살게 되면 좋겠다며 은근히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전두환 장군의 등장은 그렇지 않았다. 1979년의 10·26 사건으로 오랜 정치적 억압 속에서 벗어나 다들 자유와 민주주의의 숨결을 맛보고 싶어할 때 군부가 또 나선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군부 쿠데타 세력은 훨씬 강경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 정화’라 했던가? 그 사회 정화를 명분으로 정상적인 민주 국가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추진했다. 5·16 때의 깡패 소탕처럼 민심을 얻어 보겠다는 발상이었다. 여기저기에 정화라는 말이 붙어 다녔다. 시국이 이러니 누구나 국보위에 밉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나 같은 기업인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털털이’ 벤츠 350을 타고 다녔다. 내가 새 차를 산 것은 나이 일흔이 넘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새 차와 인연이 없었다. 다만 안전을 생각해서 크고 튼튼한 차를 타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성과 안전성이라는 두 가지 기준을 다 만족시키는 절충점이 중고 외제차였다.
나중에 새 외제차를 구입할 경제력을 갖춘 다음에도 이 같은 승용차 구매 습관을 오래도록 고수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의 수입차를 사는 것은 내가 견지해 온 합리적인 구매 습관에 맞지 않았다. 반면 사업체 규모가 커질수록 회사 대표로서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 또 더러는 관청에 드나들 때의 편의를 위해 외제차를 타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1970~1980년대에 나처럼 사업체를 키우느라 동분서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텔 도어맨에서부터 고위 관료까지 다 한 눈에 ‘알아주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일을 수월하게 풀어나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실질적인 생활문화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늘 불만이었다.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속보다 겉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허례허식이 만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감 결여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있으면 굳이 외형을 꾸미는데 매달릴 필요가 없다.
‘털털이’ 벤츠 350 이야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그 차도 6~7년 된 중고차를 싸게 사서 타고 다니던 것이었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놀라운 것은 국보위 당시 한 해 반 동안 대한민국에서 벤츠 350을 타고 다닌 사람이 나밖에 없었더라는 사실이다. 그 전까지 내 차보다 좋은 벤츠 450을 타고 다니던 어느 국내 제일의 대기업 회장은 차에서 450이라는 숫자를 떼어 내고 그 자리에 280이라는 숫자를 붙이고 다녔다. 그 사람은 나와 같은 골프장을 드나들었기에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일이다.
그 밖에도 많은 기업인들이 고급 외제 자동차는 제 집 차고에 숨겨 두고 그보다 못한 차들을 타고 다녔다. 서슬 퍼런 신군부의 권력자들에게 찍힐까 두려웠던 것이다.
국보위 시절 털털이 벤츠 뒷자리에 앉아 돌아다닐 때 내 기분은 굉장히 좋았다.
“시절이 좀 수상하다기로, 내가 내 차 타는데 누구 눈치를 본단 말인가! 나는 정치도 모르고 은행에 큰 돈 빌린 것도 없고 지난 권력에 기대서 이익 본 일도 없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다고 성한 사람에게 손을 댈 일이 있겠나? 정의와 진실에 살면 겁날 게 없다. 자 봐라, 나 벤츠 탔다.”
졸지에 대한민국에서 최고 기종의 차를 타고 서울 장안을 누비고 다니는 용감무쌍한 기업인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