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는 불가근불가원 (44회)

내가 마산, 청주 등의 먼 거리에 공장을 두고 이들 공장의 운영 상태를 밤낮으로 체크하기 위하여 밤중에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튼튼한 외제차가 필요했기 때문에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호기롭게 내차를 몰아서 현장을 누비곤 했다.

필요하면 무리한 선택이라도 결정하고 그 이후 돌아오는 모든 비난과 책임은 내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슬 퍼런 국보위 시절에도 나는 외제차를 몰고 당당하게 거리를 달릴 수 있었다. 돈 버는 벌레가 되기보다는 원칙과 신념을 지키는 기업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너무 호기 있게 시작한 듯하다. 이 벤츠 이야기는 그저 내 기억 속에 들어 있는 한 시대의 삽화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반세기 이상 기업을 이끌면서 권력의 부침(浮沈)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기업인들과는 거리가 있었던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의 흐름을 거슬러 특별히 반골 기질을 발휘하며 살아온 것도 아니다. 반골로 행동하는 것은 적극적인 정치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내 에너지를 오로지 기업 경영에만 쏟아 부었다. 그저 내 영역에서 조용히, 순리대로, 떳떳하게 기업을 경영하는데 골몰했다.

그런데 내 본의와는 달리 권력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다치기도 했다. 권력과 기업이 서로 긴밀히 공생하던 시절에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부주의하거나 무관심한 것만으로도 다칠 수가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본디 장사할 성격이 못 되는 사람이다. 6·25 직후 서울에 올라와 동대문시장에서 광목 떼어다가 팔던 보따리장수 시절부터 그랬다. 어찌해야 이익이 많이 남는지 늘 머리를 굴려야 했는데, 그 점이 서툴러서 어려움이 많았다. 장사라는 게 원가에 이윤을 좀 붙여 팔아야 남는다는 것이 뻔한 이치이다.

▲ 삼영요업(오늘의 삼영산업) 공장 준공을 시찰 중인 모습

그러나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한 수 위였다. 그 이윤만큼 또는 절반 이하로 값을 후려쳐버리니 팔수록 손해였다. 다른 장사치들은 값을 서너 배는 부른 다음 사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치열한 잔머리 싸움을 하며 밀고 당기다 값을 정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나에게는 어쩐지 꼼수처럼 여겨졌다. 따라서 ‘내가 제대로 길을 들어선 건가’ 수시로 고민하게 됐다.

결국 이 일은 집어치우고 말았다. 나중에 조그맣게 공장을 차리고, 소위 기업 경영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장사보다 제조업이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만드는 만큼 거둬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업을 운영해 나가다 보니 곧이곧대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더욱 고난도의 기술을 동원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인과 친하게 지내기, 정부 여당에 더 잘 보이는 처세술이었다. 5·16 이래로 정치와 친하다는 것은 곧 군인들과 잘 지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당시 내가 사회 흐름을 보니, 잘 나가는 기업인들은 너나없이 군인에서 옷을 바꿔 입은 관료들과 잘 어울렸다. 정경유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경유착을 멀리했다. 그렇다고 내가 어떤 정의감 때문에 정치와 거리를 둔 것은 아니다. 타고난 천품(天品) 탓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기업인과 권력층과의 대화를 옆에서 들었는데 도저히 내 비위에 맞지 않았다. 뻔히 자기보다 네댓 살 아래 관리들에게도 “형님, 형님”하는 게 내 상식으로는 영 어색해 보였다.

옛말에 ‘노안비슬(奴顔婢膝)’이라는 말이 있다. ‘남자 종의 얼굴과 여자 종의 무릎’이란 뜻으로 남자 종이 짓는 비굴한 얼굴 표정과 여자 종이 무릎걸음으로 종종거리며 아양을 떠는 모습을 말한다. 딱 그대로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면 ‘참 비윗살도 좋다. 당장 사업이 망하더라도 나는 그렇게는 못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성질이 그러하니 정경유착을 거름 삼아 기업이 부쩍부쩍 성장하던 시절에 한마디로 나는 ‘야성 기업인’이었다. 특별히 반골이어서가 아니라 권력에 무심한 것만으로 본의 아니게 그렇게 분류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기업을 잘 이끌어 온 것 자체가 어찌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