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청기를 끼게 된 사연-2 (46회)

‘대체 내가 하늘 아래 무슨 떳떳하지 못한 일을 했다고

젊은 사람한테 뺨까지 맞고

귀마저 못 쓰게 되었단 말인가?’

그래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인륜이 땅에 떨어졌다고 하지만 아들뻘밖에 안 되는 젊은이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불러다가 따귀를 때릴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왜 내가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사실 관계라도 알아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권력 언저리에 서성거릴 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자연스런 인간관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내가 젊은 시절 의령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을 때 가르쳤던 권복경이라는 제자가 당시 치안본부장(오늘의 경찰청장) 자리에 있었다. 그간 전혀 연락이 없었던 처지도 아니어서, 상황 설명을 하면 진상 조사에 나서 주리라고 믿으며 전화를 했다. 과연 내 이름을 대니 어렵지 않게 통화가 이뤄졌다.

“권군인가?”
“네.”
“아니, 이 밝은 세상에 오밤 중에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서는 사정없이 두들겨 패더라. 도저히 분해서 참을 수가 없으니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보고 처리해…….”
“제가 지금 바빠서 나중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내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상대방이 딸깍 전화를 끊어버렸다. 국민의 재산과 치안을 담당한다는 경찰의 총책임자가 한때 자기의 스승이었던 사람이 겪은 언어도단의 사건에 대해 놀라서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앗 뜨거워라’ 하고 꽁무니를 빼니 서운함에 앞서 기가 막혔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여전히 ‘밝은 세상’이 아니라 ‘어두운 세상’이었던 것이다.

2010년 봄 권복경 전 치안본부장이 내 방에 찾아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당시의 서운한 마음을 털어 놓았다. 권 본부장은 “선생님께서 당한 봉변은 제가 당한 것과 같은 일인데, 제가 알았더라면 그렇게 처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제가 데리고 있던 비서가 같은 성을 가진 권 모 경감인데 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자기 선에서 그렇게 처리한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기에 권 본부장에 대한 오해는 풀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당시 주변 사람들은 “거기 들어가서 28시간 만에 나왔다는 것만 해도 유사 이래 없는 일일 것이다. 보통 들어갔다 하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한정이 없다더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며 그대로 덮고 넘어가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대체 내가 하늘 아래 무슨 떳떳하지 못한 일을 했다고 젊은 사람한테 뺨까지 맞고 귀마저 못 쓰게 되었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라 회사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내가 당한 사건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믿었던 치안본부장이 몰라라 하니 이런 일을 알아보는 데는 일선 간부가 오히려 더 낫겟다 싶어 동대문 경찰서장을 집으로 불렀다.

오해를 막기 위해 밝힌다. 나는 경찰서장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오라 가라 하던 막강한 인물이 아니다. 이 역시 자연스럽게 맺어진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삼영화학이 상공회의소 빌딩으로 옮기기 전 22년 동안 남대문 그랜드 호텔에 내 사무실이 있었는데, 바로 옆 건물이 서울시 경찰국이었다. 거기 근무하는 경찰 한 사람이 경북 사람이어서 명절이면 인사도 나누고 오랫동안 훈훈하게 대했다. 그 사람이 동대문서장으로 부임을 하더니, 옛정을 잊지 않고 내게 인사를 와서 왕래가 이어졌던 것이다.

내 전화를 받더니 용건은 들어보기도 전에 집으로 찾아뵙겠다고 하기에 오라고 했다. 경찰총수의 행태를 생각하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나오나 한 번 보자 싶었다. 곧 달려온 그에게 내가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며 겪은 바를 이야기하고 차분하게 요청했다.

“내가 어찌 된 영문인지를 알아야 대책을 세우고 이 억울함을 풀것 아니오? 이 일을 시킨 기관이 정보부(안기부)인가 보안사인가 그거나 좀 알고 싶소.”

그러자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서더니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일이 바빠서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하고는 혼비백산한 듯 줄행랑을 쳤다. 참 무서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오긴 했으되 아직 봄이 아니었다.

그래도 물러설 수 없었다. 오기와 고집 하면 나 아닌가? 그게 없었다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끈질기게 알아봤다. 현 정부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라야 내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싶어서 소개받은 사람이 전두환 씨의 처삼촌인 이규광 씨였다. 예고도 없이 한밤에 그 집을 찾아가 내 명함을 넣으니 문을 열어 줬다. 이규광 씨는 보안사의 짓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정보부(안기부)의 짓이었다. 또 동창 이름을 팔며 내 사무실로 찾아왔던 자가 넥타이에 녹음기를 차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고는 내 앞에서 진보 세력 운운했으니 생사람을 잡으려 했다는 증거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때 만일 손님 대접 차원에서 건성으로라도 맞장구를 쳤더라면 나는 영락없이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내 책상 서랍 속에는 지금도 ‘1987년 11월 2일 중앙정보부 사건’이라고 내 손으로 적어 놓은 흰 봉투가 있다. 그 안에는 의사 도장이 찍힌 11월 7일자 진단서와 피멍 든 내 몸 여기저기를 찍은 사진이 들어 있다. 힘 있는 자들에게 아부할 궁리 안 하고 소같이 우직하게 일만했던 나를 왜 잡아다가 양쪽 귀를 못 쓰게 만들었는지 아직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해명을 들은 바 없다. 오로지 선거를 앞두고 기업마다 알아서 정치 자금을 헌납하던 분위기 속에서 내가 자진 납부를 하지않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할 뿐이다.

이 사건 발생 후 꼭 27년 10개월 만에 나는 2015년 9월 어느 날 전두환 전 대통령을 연희동 자택으로 방문하여 환담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보청기를 끼게 된 사연을 꺼내고 말았다. 전 전 대통령은 나의 이야기를 듣자 바로 그 자리에서 심심한 유감을 표시하였다. 본인이 그때 알았더라면 바로 시정조치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의 심정이 그나마 위로를 받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