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반 만의 사필귀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눈을 감고 갈 수 없게 됐을 것이다.
지난 1973년 국제전선을 기존 전선업체에 빼앗기다시피 하고 나서부터 누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사업이 아니면 손대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 후 1년이 지난 어느 날, 국가 기간산업인 전력에너지 산업에서 그런 사업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전력 송배전 시설에 필수적인 애자 산업을 말한다. 당시 국내에는 소규모 애자 제조업체가 여러 곳 있었지만 저압배전용 애자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할 정도로 영세했다. 따라서 초고압과 초초고압 등 고압용 애자는 물론 저압용 애자까지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게다가 국제적으로 일본과 중국이 선발 주자였고, 애자 산업은 힘들다는 소문이 나 있어 국내에서는 누구도 진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들 뜯어말렸지만, 나는 여기서도 역발상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1978년의 일이다. 마산에 고려애자 공장을 짓고 자기 애자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시련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애자란 만들기가 여간 까다로운 제품이 아니었다. 내가 애자 산업을 한다고 할 때 모두가 말렸던 이유를 실감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한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는 것이 내 특기 아닌가? 일주일이 멀다 하고 서울과 마산을 수시로 오르내렸다. 드디어 4년 만에 191mm 고압 배전용 현수 애자의 개발에 성공했다. 한국전기기술원의 까다로운 심사도 통과했다.
고려애자의 한전 납품도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애자 값도 국산 애자 개발 전 일본산 애자를 도입할 때의 4분의 1 가격으로 납품했다. 2000년에는 280mm(210KN) 초고압 애자를 개발하고 2001년에는 300KN 송전용 초고압 현수 애자를 개발했다. 또 2006년에는 400KN 송전용 초초고압 애자를 개발했다. 저압에서 초초고압애자 개발까지 약 28년이 걸린 셈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 몇 십 년 걸린 일이다. 중국 소주애자 대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실적을 바탕으로 국내 납품을 본격화했다.
우리는 이러한 개발과 사용 과정의 실적을 바탕으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세계 자기 애자 시장에 적극 뛰어들었다. 1990년대 중반 대만에 현수 애자, 인도네시아에 라인포스트 애자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1996년에는 태국에 12만 개의 라인포스트 애자를 수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태국의 시험에서 불합격 판정이 나와 수출한 애자의 전량 반송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국내에서 납품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동일한 제품인데도 그렇게 되다니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확인 결과 수출을 국내 다른 무역회사가 대행하도록 했는데 통관, 시험 절차의 미숙함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태국의 다른 권위 있는 시험 기관에 의뢰하여 나온 시험 결과는 정상이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태국 정부 당국에서 한번 내린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나는 대책을 지시했다. 그 결론은 반송된 애자는 우리가 국내에서 납품 사용되는 제품과 같은 것이고 단지 OEM 방식으로 태국전력청마크를 달게 해 준 것뿐이므로 우리 마크로 다시 바꿔 달고 국내 성능 시험을 다시 거치면 국내 납품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고문 변호사의 의견도 같았다.
우리는 이에 따라 자체 시험과 한전의 성능 시험 과정을 다시 거쳐 정상적으로 납품했다. 그리고 실제 사용 중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한두 해가 지난 뒤 고려애자의 공장 직원 한 사람이 사적 비리혐의로 물러나게 됐는데, 그 사람이 이 마크 문제를 빌미로 협박을 해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협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거부하도록 지시했다. 그 사람은 끝내 우리를 이 문제로 고발했다.
2003년 12월 창원지검에서 처음에는 문제 삼지 않을 듯하다가 갑자기 나를 불구속 기소했다. 그 과정에 어떤 외압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생략하기로 한다. 일부 지방 신문과 방송은 이 사실을 여과 없이 일방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여든의 나이에 세계 1등 인재육성을 위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 자체가 불명예였다.
2004년 6월 16일 창원지법은 우리의 무죄 주장에도 불구하고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다른 것은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마크를 바꿔 단 것은 잘못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즉각 항소했다. 그리고 드디어 다음 해 1월 20일 부산고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자사 제품의 단순한 마크 변경은 무방한 것이고 납품 사용 중인 애자가 한전의 사전 성능 검사를 거쳤으며 현재도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검찰이 상고를 했다. 2006년 1월 26일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부산고법의 판결대로 우리의 무죄를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마침내 멍에가 완전히 벗겨졌다. 2년 반 만의 사필귀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눈을 감고 갈 수 없게 됐을 것이다.
그 동안 무죄를 입증하는 데 애쓴 우리 임직원들은 “이렇게 끝날사건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도록 했어야 하는 건데……” 하고 아쉬워했다. 나는 “깨끗이 끝난 게 오히려 잘 됐다”고 했다. 함께 포도주 한 잔씩 나누며 그간의 시름을 모두 떨쳐버렸다.
이 사건의 무죄 판결은 그 후 고려애자의 앞날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고려애자 내에서는 누가 어떤 구실로도 흠을 잡을 수 없는 완벽한 제품을 만들자는 PQ(Perfect Quality)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는 값이 싸고 가볍다는 신제품 폴리머 애자의 등장으로 자기 애자 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자기 애자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으며, 중소기업 보호 품목으로 지정됨으로써 자기 애자 부활의 계기가 됐다.
나는 이를 발판으로 북한에 대한 우리나라의 전력 지원 사업의 길이 열릴 때, 우리 고려애자의 애자가 북한 지역 전역의 동력선에 매달리게 되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