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에 들기 직전, 머리맡의 휴대폰을 들어 다롄 공장 생산 현장 상황을 마지막으로 챙겨 본다. 낮에 ‘파탄’으로 작업이 중단됐다가 원인을 규명해 바로잡고 겨우 작업이 재개된 상황이었다.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작업 중인 실무자들을 전화로 호출하면 일에 방해될까봐 상황실 번호를 눌렀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이번에는 경비실 전화번호를 서둘러 눌렀다. 다행히 조선족 경비원이 전화를 받았다.
“현장에서 또 터졌나? 전화를 안 받는데 현장에 가보시오.”
현장으로 달려간 경비원의 전갈을 받았는지 잠시 후에 생산 라인실무 책임자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또 파탄이 나서 기계를 세우고 시설을 점검 중이라고 했다. 전화로 그쪽 상황을 보고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내 머릿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모든 데이터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점검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전해 주었다.
이튿날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머리맡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한족(漢族)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지만 용건은 주고받을 수 있었다.
“파탄? 무파탄?”
“무파탄!”
‘밤사이 기계가 다시 무사히 돌아가기 시작했구나.’
그제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파탄이란 필름이 터지는 것을 말한다. 기계가 1분에 350미터 안팎의 속도로 두께 5마이크로, 폭 8미터의 초박막 필름을 생산하는데 습도와 온도를 비롯한 모든 조건이 언제나 균일해야 한다. 단 한 가지라도 미세하게 삐끗하면 필름이 밀리거나, 기포가 생기거나 터진다. 그런 모든 조건이 정확히 맞아도 태평양 한복판 같은 청정함이 유지되지 않으면 불순물로 인한 에러가 난다.
청주 공장이 극 초박막 캐파시터 필름 생산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면서부터 시계가 자정을 한참 넘겨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날이 잦아졌다. 잠자리에 들기 전 간단한 상황 점검 차 전화기를 붙들었다가 잠옷을 입은 채로 현장 지휘관처럼 다롄으로, 청주로 전화를 하다 보면 취침 시간을 놓치기 일쑤다.
|
|
| ▲ 삼영화학 청주공장 내 청정지역, 캐파시터 필름을 생산하는 모습 |
|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최상의 장비를 들여놓았지만 삼영화학이 3마이크로 시대를 제대로 여느냐 못 여느냐는 결국 그 기계를 돌리고 관리하는 ‘사람’에 달렸다. 청주 공장에도 다롄 공장에도 사장이 있고 공장장이 있지만 공장의 기계 돌아가는 세부 사항에 대해 공장장보다도, 현장 실무자보다도 더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나다.
현장의 상황은 늘 공식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따라서 제원과 생산 프로세스에 대해 머릿속에 꿰고 있다 해도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현장을 종일 지키는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서울 명륜동에서 휴대폰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경험의 힘이다. 그러니 내 몸이 어디에 머물러 있든지 나는 공장장이다.
전국에 흩어진 현장을 시시때때로 돌아보고 수시로 다롄으로 날아간다. 휴일에도 가동하는 공장들이 있으니 내게는 휴일이 없다. 휴일에도 어느 공장에서든 일이 터지면 종일 전화로 지시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 나는 언제든 필요할 때 수첩을 뒤지지 않고 곧바로 휴대폰 숫자 버튼을 눌러 통화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50개 이상 알고 있다.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기억시켜 놓고 단축키로 불러내는 기능은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이 나이에도 업무에 지장 없는 초롱초롱한 기억력을 유지하려면 계속 두뇌의 기능을 활발하게 해 주는 게 최선이다. 기계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듯이 기억력의 감퇴도 따지고 보면 두뇌의 퇴화 현상이라기보다는 나이 먹으면서 새롭게 두뇌에 뭔가 기억시키는 일이 줄어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로지 치매 예방 차원에서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부차적인 이득일 뿐이다. 나는 오늘까지 비서를 시켜서 전화를 걸어 본 일이 거의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꺼내어 바로 전화번호를 눌러 연결하는 게 가장 신속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속도 경영 시대라고 하는데, 나로 말하자면 수십 년째 속도 경영을 몸소 실천해 오고 있는 셈이다. 나는 폼을 잡기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게 아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일은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 폼은 다른 데 가서 잡으면 그만이다. 회사의 생명은 효율성과 속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