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이 각 계열사의 현황을 챙기는 데 몇몇 수뇌부와 통화하면 충분하지 왜 전화번호를 50개 이상씩이나 외우고 있느냐고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속도 경영 때문이다. 회장이라고 언제나 간부들하고만 통화하라는 법이 있는가? 간부와 통화할 일, 현장 팀장과 통화할 일, 새로 가동하기 시작한 기계를 돌리는 말단 실무자와 통화할 일이 다 다르다.
말단 실무자와 통화해야 할 일에 간부를 부르는 것도 비효율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 순간 누구를 찾아야 내가 파악하고 싶은 바를 빨리 파악할 수 있는지, 누구를 채근해야 내 뜻이 가장 빠르게 현장에 전해지겠는지, 그때그때 판단해서 통화 상대자를 선택한다.
통화하고 싶을 때 연결이 안 되는 일이 없도록 한 사람마다 사무실, 집, 휴대폰 번호를 동시에 기억하고 있다. 중국 다롄 공장과의 통화에 는 저렴한 인터넷 전화를 많이 이용하는데, 전화번호가 여간 긴 게 아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번호들까지 무리 없이 잘 외우고 있다. 그 어떤 간부의 전자수첩도 내 머리만큼 입력과 출력이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라고 자부한다.
동석했던 간부에게 업무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그 간부가 다시 담당 직원과 통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를 찾을 때가 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다.
“회장 머릿속에 그 직원 전화번호가 있는데 어찌 직속상관 머릿속에는 없나요?”
나도 모르게 이런 면박성 질문을 던지게 된다. 대기업 삼성을 움직이는 것은 이건희 회장이 아니라 우수한 두뇌 집단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다르다. 물론 중소기업도 저마다 업무 형태가 다르겠지만 내가 한평생 중소기업을 경영해 본 경험으로 볼 때 중소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다. 그 개인이란 두 말 할 것도 없이 최고경영자다. 회장 한 사람이 밤잠을 줄이고 휴일을 회사 일에 바치는 것이 밑거름이 되어야 회사가 원활하게 돌아가고, 한 건의 안전사고라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너’가 회사 실무에 너무 속속들이 관여하면 경영진이 나태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경영진의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여지도 줄어든다. ‘괜히 잘 모르면서 나섰다가 일을 그르치느니 시키는 거나 잘하자’는 수동적인 처세술이 회사에 팽배하면 그 회사는 발전할 수 없다. ‘오너’ 면전에서 ‘안 됩니다’라는 고언을 할 수 있는 경영진이 아무도 없다면 그 회사는 발전할 수 없다. 인간은 아무리 유능해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의 딜레마는 대기업에는 일정한 부문에서 회장보다 뛰어난 식견과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경영진이 있지만 중소기업에는 그런 인재가 드물다는 사실이다. 거듭 이야기하거니와 나는 대학에서 이공계통의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고, 합성수지 가공업에 대해 체계적인 이론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알아야 면장을 하는 제조업의 세계에서는 이론보다 긴요한 것이 현장 경험이다.
세라믹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전혀 공부한 바가 없지만 긴 세월 천신만고 끝에 대한민국 최초로 초초고압 애자 제조기술 개발에 성공한 사례가 그것이다.
고려애자야말로 이론이 아닌 경험과 노력의 승리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아무리 대학 나온 기술자들을 전문 인력으로 채용한다 해도 내가 챙겨야 할 일은 줄어들지 않는다. 내가 최고경영자이자 공장장으로 1인 다역을 도맡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끊임없이 현장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고 배운다. 누구에게 배우나? 우선 나 스스로에게서 배운다. 다음으로 실무자들로부터 배운다. 내가 때로는 질책하고 면박을 주는 현장 실무자들이 역설적으로 나의 스승 노릇을 한다. 그들을 통해 공장 에러의 수많은 경우의 수를 파악하고 내 두뇌 안에 데이터베이스로 저장할 수 있다.
껍데기만 아는 실무자라도 그를 붙들고 그가 파악하고 있는 바를 꼬치꼬치 묻고 또 묻다 보면 기술의 요체를 캐낼 수 있다. 결국 오너가 달라붙어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실무자들로부터 배우고 그 깨우침으로 다시 실무자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의 일과를 ‘나인 투 파이브(9 to 5)’라고 한다. 이에 비해 기업 총수들은 대개 ‘파이브 투 나인(5 to 9)’으로도 모자란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일과는 ‘파이브 투 투엘브(5 to 12)’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건강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머물러 있는 곳이 다롄이든 청주든 제주든 마산이든 서울 명륜동 내 집이든, 아침 다섯 시에 눈을 뜨면 공장장으로서 또 하루가 열린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날마다 이렇게 다짐한다.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보는 자세로 임할 것. 첫째도 안전관리, 둘째 도 안전관리, 셋째도 안전관리. 호통 칠 때는 가차 없이 호통치고, 칭찬할 점을 찾아냈을 때는 마음껏 칭찬해 줄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