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참신한 디자인의 꽃 장판으로 장안에 히트를 쳤던 이야기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다. 꽃 장판은 요즈음 아파트 거실이나 사무실에 까는 인테리어용 고급 바닥재에 견주어 보면 두께가 얇고 무늬도 어설펐지만 당시로서는 도배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재래식 장판을 대신하는 획기적인 바닥재였다. 그때는 그 장판을 ‘후로링’이라고들 불렀다. 마루라는 뜻의 영어 ‘플로어(Floor)’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라스틱 그릇을 한 5~6년 만들어 팔다가 ‘후로링’에 손을 댔는데 한마디로 ‘대박’이 터졌다.
후발 주자로서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황금색을 써서 승부수를 던지자 시장에서 즉각 반응이 왔다. 곧이어 주문이 쇄도하니 우리보다 4~5년 먼저 시작한 럭키화학, 동신화학을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물건이 부족하자 소매상들이 생산자인 나보다도 더 애가 닳아서 공장에서 물건이 나오는 대로 보내 달라고 선금을 주고 가기도 했다.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데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대박’의 일등 공신인 독일제 황금색 안료가 바닥이 났다. 예상보다 많은 양의 꽃 장판을 생산해 내니 충분히 확보해 놓았다고 믿었던 안료가 너무 일찍 떨어진 것이다. 독일에 연락하니 똑같은 황금색 안료는 재고가 없고 새로 만들어 보내면 두어 달 후에나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제 어떻게 하나? 시장 반응이 한창 좋을 때 부지런히 팔아야지, 두어 달이나 지나서 뒷북을 치면 과연 소비자들이 목 빼고 기다렸다가 반겨 줄까, 그 사이에 경쟁 업체에서 또 다른 신제품으로 치고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가만히 앉아서 놓친다는 게 너무나 속이 쓰렸다. 속수무책인 내 자신이 용납이 안 됐다. 부랴부랴 출장 준비를 했다. 홍콩에 안료 상가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만 알고 있었지 어디로 가야 내가 찾는 안료를 살 수 있을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일본에 갈 때 길잡이 역할을 해주던 여행사 사람을 급히 홍콩으로 오라고 부탁하고 그 길로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안료 상가들을 찾아 돌아다니며 샅샅이 뒤져서 발견하는 대로 황금색 안료를 사들였다.
호텔방에 모아 놓으니 크기가 저마다 다른 안료 통이 수십 개나 되었다. 그 상태로 지금보다 백배 더 까다로웠던 대한민국 세관을 통과하려면 일이 간단치 않을 것 같았다. 궁리 끝에 밖으로 나와 큼지막한 플라스틱 용기를 하나 사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하나씩 안료 통의 포장을 뜯고 그 용기에 쏟아 부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에 시작했는데 테이프로 밀봉 작업까지 말끔히 마치고 나니 한 밤중이었다.
조그만 호텔방에서 말 상대도 없이 어찌나 그 일에 열중했던지, 빈 안료 통이며 포장지 나부랭이를 정리하고 허리를 펴며 일어서는데 정신이 어질어질 눈앞이 노래졌다. 안료의 휘발성 물질이 실내에 퍼져 중독 일보 직전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내가 명을 짧게 타고났다면 그때 홍콩의 조그만 호텔 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영영 잠들었을지 모른다.
득의양양하게 서울로 돌아왔다. 한동안 공장이 잘 돌아갔고 꽃 장판은 여전히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홍콩에서 조달한 안료조차도 바닥이 났다. 홍콩의 안료 상가에서는 황금색 안료를 이미 내가 싹쓸이하다시피 했으므로 이번에는 일본 도쿄로 갔다. 그러나 안료 상가를 뒤져도 별 소득이 없었다.
‘내가 의사소통이 어려운 홍콩 바닥에서도 목적한 바를 해냈는데 말이 잘 통하는 일본에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강한 오기가 생겨서 다시 백방으로 정보를 찾아다녔다. 드디어 나의 레이더망에 뭔가 걸려들었다. 독일에서 수입해서 통관 문제로 일본 세관에 계류 중인 안료 박스에 황금색 안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장 독일 본사로 연락을 취했다.
“당신들 회사의 일본 측 에이전트가 누구요? 그쪽하고 급히 교섭을 좀 해야겠소.”
이러한 경로를 통하며 이튿날 나는 다시 상당량의 황금색 안료를 확보하고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일 본사 사람들도, 일본 에이전트도 내 수완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은 고인이 된 현대그룹의 창시자 정주영 회장이 늘 “해 봤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사실 우리 같은 창업 1세대들은 절대 공감하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일상사에서 쉽게 ‘그건 어쩔 수없어’, ‘그건 불가능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 분명 있기는 있다. 그러나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런 일은 사람의 한평생에서 몇 번 부딪치지 않는다. 나머지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포기해 버리려는 마음 자세만 바꾸면 길이 보이는 문제들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말이 그래서 있는 것이다.
필요하다고 확신하면 나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들소처럼 돌진한다. 그런 나의 모습이 지독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꽤 있음을 나도 안다. 그러나 남의 이목 따위에 연연해서는 아무일도 이룰 수 없다. 나는 직원들에게서도 설정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저돌적인 자세를 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내 눈에 그들의 적극성이 모자라 보일 때는 그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깜박했습니다”, “다시 회장님의 지시가 없으시기에” 등등……. 이런 변명이 내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언젠가 회사에 필요한 장비를 싸게 구입할 절호의 구매 찬스를 포착해서 담당 부서에 정보를 주었는데 나중에 물어 보니 대답이 “예, 그 업체에 전화해서 카탈로그 부치라고 했습니다”였다. 나는 이럴 때 언성을 높이지 않을 수가없다.
“회장이 좋은 정보를 줬는데도 그 며칠 동안 고작 한 일이 앉은 자리에서 전화 눌러 카탈로그 부치라고 한 것밖에 없소? 우리가 새로 공장 차리는 거 아닙니다. 지금 공장에 필요한 기계 규격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성능과 가격을 제시하고 맞아떨어지는 제품이 있으면 당장 달려가야지, 사진 몇 쪽 보자고 며칠을 허비합니까? 앉아 기다렸다가 카탈로그 뒤적거려 보고, 그러는 사이에 구매찬스를 놓치면 어찌할 거요?”
흔히 사람들은 ‘오너’와 월급쟁이의 차이를 말한다. 당장 자기 잇속이 걸린 ‘오너’는 몸 부서지는 줄 모르고 뛰지만 월급쟁이는 다르다고 한다. 또 최종 결정권자와 결정권이 없는 사람을 나란히 놓고 일하는 스타일을 견줄 수는 없다고도 말한다. 나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평생 월급쟁이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평생 ‘오너’ 자리에서만 일해 본 나만의 독단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일본의 아사이화섬 미야자키 회장은 명문 동경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중소기업체인 아사이화섬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여 회사를 세계적인 화섬 업체로 키운 장본인이다. 그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경영자는 이렇게 공부하라》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종업원의 조건은 회사와 더불어 성장하겠다는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며, 내가 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회사업무에 임할 때 내 인생이 달라지고 회사도 발전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직원들을 모아 놓고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내용의 당부를 할 때가 있다. 그때 직원들의 눈빛만 보아도 ‘저 친구는 내말을 진심으로 듣는구나, 저 친구는 그냥 흘려버리는구나’를 알 수 있다. 그 두 가지 유형의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앞의 직원은 내 일처럼 열의와 창의를 다해 최선을 다하지만 뒤의 직원은 대충대충 시간만 때운다.
물론 시골 정미소 시절부터 서울로 올라와 구멍가게만한 사업체를 일구던 시절 그리고 오늘날까지, 어디 고용되어 일해 본 경험이 없는게 나의 핸디캡이라면 핸디캡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내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확신한다. 꽃 장판이 대 히트를 쳤을 때 내가 만일 주인의식이 없는 직원이었다면 날개 돋친 듯이 팔리는 신상품의 원자재를 대지 못하고 손을 놓아버렸을 것이다.
자신이 회사의 주인이 아니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때 그 일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간단하게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시오’라고 백 번 강조하고 싶지만, 그 말이 직원들 귀에는 그저 회장이 늘 하는 뻔한 소리로 들리고 하나의 수사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그 직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 스스로 당신 업무의 주인이 되십시오. 일이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발전이 없습니다.”
이는 번듯한 직장의 직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그만 주차장 관리 요원들을 보자. 누구나 똑같은 일을 하는 것 같아도 그 조그만 공간을 관리하는 스타일이 백인백색으로 다르다. 자기가 관리해야 하는 주차 공간에 어찌하면 효율적으로 차들이 드나들 수 있을까 늘 궁리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관리인이 있는가 하면 ‘차빼라, 만차(滿車)다’ 그저 하루 종일 인상 쓰고 빽빽거리는 관리인도 있다.
수시로 드나드는 차와 아침에 대면 저녁에나 빼는 차를 제대로 파악하여 공간을 안배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관리인이 있는가 하면 10분 후에 뺄 차 앞에 저녁에나 뺄 차를 주차시켜 좁은 공간이 들고나는 차들로 종일 북적거리게 하는 관리인도 있다. 자기가 하는 일의 주인인지 종(從)인지, 그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조금만 관찰하면 금세 드러난다. 주인처럼 일하는 사람에게는 경험과 함께 운영의 노하우가 쌓이지만 종처럼 일하는 사람에게는 경험도 노하우도 쌓이지않는다. 노하우의 축적 없이 일하는 사람에게서 무슨 아이디어를, 창의성을 기대할 것인가? 나는 감히 후배들에게 말한다.
“자기가 받는 월급의 열 배는 일해야 합니다. 연봉 1억 원이면 회사에 10억 원의 가치를 발휘해 주어야 합니다. 월급만큼 일한다는 생각으로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시키는 대로만 일해서는 월급의 열 배 가치를 창출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세요. 그것이 당신의 미래를 열어주는 확실한 지름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