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가 오기 전에 이미 삼영화학에는 위기가 닥친 적이 있다. 당시 삼영화학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나는 고려애자에서 애자 개발에 전념하고 있을 때이다. 삼영화학은 당시 확대 경영 추세의 파도를 잘못 타다 급기야 난파 일보 직전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뒤늦게 뛰어들어 신도림동의 공장을 처분해서 부도를 막고 위기 상황을 수습했다.
그동안의 빚을 다 갚은 것은 물론이고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다시 쾌속 순항이 시작된 것이다. 그 직후 외환 위기가 닥쳤는데도 삼영화학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잘 버텨냈다. 버틴 정도가 아니다. 다들 자금 조달이 안 되어 다급하게 동분서주할 때에 우리는 흑자 경영을 지속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자신감을 얻은 나는 신규 사업을 감행했다. 먼 중국 다롄땅에 나의 오랜 꿈을 펼친 것이다. 2002년 8월에 첫 삽을 뜬 중국 다롄의 삼영화학유한공사는 2004년 4월에 문을 열었다. 나는 한 해의 절반 이상을 다롄에서 보내는 숨 가쁜 나날을 보냈다.
내가 팔십 고령에 중국에 6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공장을 세웠을 때는 돈을 벌 목적이 아니었다. 인생을 정리할 나이에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진출을 했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닌가? 나에게는 중국에 공장을 세운 다른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나는 세계무대에서 미국이 패권을 잡고 독주하도록 방치해서는 훗날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 견제세력으로서 중국이 지금보다 힘을 키워서 국제적 영향력을 더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국과 중국이 비슷하게 되는 것이 우리나라에 유리한 일이며, 그렇게 되도록 중국을 돕고 싶었다.
나는 2차 대전 말기에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가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동북아시아국가들이 공존공영을 모색해야 평화와 번영이 온다는 것이었다. 나의 중국 진출 참뜻이 거기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중국 공장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다 중국에 되돌려 준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 실천 방안으로 중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이미 한국에 유학 중인 중국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고, 앞으로는 다롄 주변에 있는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할 생각이다. 수혜자는 우선 500명 선에서 시작하고 형편에 따라 차차 늘려 최대 3천 명까지 지급할 예정이다.
중국 현지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나의 의지를 확인하자, 다롄 개발구 당국에서도 삼영화학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사실 중국인의 ‘만만디’ 기질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행정 당국과 필요한 협상들을 이뤄나가는데 예정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중국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들이 속을 끓이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다롄삼영화학유한공사’는 1년 반 만에 계약에서 준공까지 일사천리로 끝낼 수 있었다. 그것은 중국 정부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장 가동 후 성과도 상당히 긍정적이다. 보통 해외 공장 건설 후 한두 해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삼영화학은 처음부터 흑자경영을 이루어 내었다.
2008년 현재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국의 20분의 1도 못 되지만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의 7분의 1까지 따라왔다. 2020년경이면 중국의 GDP가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총 무역량은 이미 미국의 절반 수준으로 성장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으로서 중국이 막강한 경제 국가로 성장하는 데에 지속적으로 힘을 실어 주고 싶다. 나아가 오랜 역사의 한족(漢族) 앞에 한국인의 격을 올려놓고 싶다. 이 나이에도 한 달에 두세 차례 피곤한 줄도 모르고 다롄에 다녀오고 있다. 나날이 새로운 도전이며 모험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다롄 공장이 완공되어 한족 인력을 쓰다 보니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민족적인 갈등이 생각보다 컸다. ‘우리가 지금 기술이 뒤떨어져서 당신들 밑에 고용되어 일을 하지만 언젠가 두고 봅시다’ 하는 듯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민족적 우월감이나 자존심, 오랜 세월 동안 대국으로 군림해 왔던 민족의 자부심 같은 것은 오늘의 상황이 어떠하든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그러한 그들 앞에 우리가 경제적으로 우쭐한 태도로 접근해서는 일을 그르치기 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