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롄 공장에서 같은 날에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이다. 나는 작업장을 둘러볼 때 중요한 기계 가동 현장을 샅샅이 살펴보지만 후미진 구석을 꼭 챙겨 본다. 책임자를 앞세우고 중요한 장소만 점검하며 다닌다고 해도 지적할 점이 내 눈에 들어온다. 더러는 담당자를 불러 크게 질책할 일이 생긴다. 공장을 50년 이끌어온 베테랑인 내 눈에만 잡히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자기들 나름으로는 긴장해서 철저히 점검을 했다 해도 허점이 보이고 바로잡아야 할 점이 숱하다. 그러니 눈에 안 띄는 장소의 상황이야 더 말해 무엇 하랴, 후미진 구석을 잘 살펴보면 내가 없을 때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관리 상태가 청신호인지 적신호인지 알아 낼 수 있다.
캐파시터 라인을 돌다가 문득 보니 줄지어 늘어서 있는 설비와 벽 사이에 사람 하나 드나들 만한 공간이 있었다. 고개를 쑥 들이밀어 좌우를 살펴보았더니 하얗게 둘둘 말린 게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꺼내 왔다. 쫙 펼치니 두툼하고 넓은 스펀지였다. 누군가 기계 돌아가는 시간에 수시로 그곳에 기어들어가 팔자 좋게 곯아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는 증거품이다.
캐파시터 필름을 주문 규격에 맞게 절단하는 ‘슬리터’ 라인 팀장의 소행이었다. 작업모 아래로 목을 다 덮을 지경인 긴 머리카락이 눈에 거슬려 몇 차례 주의를 주었던 한족이었다.
나는 그 청년을 그 날로 공장에서 떠나게 했다. “한국에 데려다가 청주 공장 연수 과정을 밟게 해서 이제 겨우 일을 시킬 만큼 키웠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공장장까지 나서서 두둔을 했지만 나의 지시는 거둬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결정적인 과실을 두고 일벌백계하지 않으면 첨단 설비의 공장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 없다.
OPP 라인을 둘러보면서 컨트롤 룸을 지났다. 첨단 기계들의 현재 가동 상황을 파악하고 이상을 체크하는 관제탑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리저리 훑어봐도 의자가 없었다.
“여기는 의자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오?”
의아한 마음으로 물었더니 그 곳 근무자에게 들은 대답이다.
“새 기계를 가동 중이라 요즈음은 잠시도 화면에서 눈을 떼면 안 됩니다. 의자가 하나 있으면 자꾸 이 사람 저 사람 거기 앉게 되고 그러다 보면 긴장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새 기계가 안정적으로 가동될 때까지는 아예 의자 없이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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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렌, 삼영화학 준공식 / 유공자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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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다. 아무리 8시간 교대 근무라지만 근무 시간 내내 서서 긴장을 유지하라고 근무 수칙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그 필요성을 절감하여 하나 있던 의자마저 치워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초긴장 상태에 돌입한 작업장에서 8시간 선채로 긴장해 있기를 선택한 그 정신이 너무나 좋았다. 당장 공장장을 불러 이야기했다.
“컨트롤 룸에 하나 있던 의자를 그 방 근무자들이 자진해서 치워버린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의자가 늘어나는 것만 감시하지 말고 있던 의자가 없어진 것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나태한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 관리의 전부가 아니오. 그 반대 모습을 알아채는 것도 중요한 관리요. 눈을 부라리고 공장 백날 돌아다녀도 잡아낼 것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면 말짱 헛일 아니겠소? 그 직원 사고방식이 제대로 된 것 같으니 불러다가 칭찬해 주시오.”
공장을 돌아볼 때는 생산 라인만이 아니라 공장 사람들이 이용하는 화장실에도 들른다. 한번은 변기의 물이 제대로 안 내려가 고여 있었다. 살펴보니 담배꽁초를 마구 버려서 변기의 배수구가 막혀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고무장갑도 안 낀 맨손을 변기에 집어넣어 구멍을 메운 꽁초들을 건져 올렸다. 나를 수행하던 사람들이 기절초풍을 했다. 그 뒤로 다시는 변기가 엉망으로 막혀 있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
내가 배수구를 잘 뚫어놓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회장이 막힌 변기를 손으로 뚫었다’는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 화장실을 이용하는 직원들이 다들 조금씩 화장실 관리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회장의 쓸모는 이토록 다양하다.
여자 화장실도 안이 텅 비었음을 확인하면 잠시 들어가서 돌아본다. 제대로 정돈이 되어있나 너저분한 부분이 없나 돌아본다. 어느 집안이고 공장이고 그 구성원들이 쓰는 화장실이 반짝반짝 윤이 날 만큼 청결하면 다른 부분은 보지 않아도 된다. 녹슨 도기에 때가 구질구질하게 끼어 있다면 그 공장 생산품의 품질을 한번 의심해 보아야 한다.
한번은 청주 공장의 생산 라인을 돌다가 기계에 기름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서슴없이 양복 윗주머니에 꽂혀 있던 손수건을 꺼내어 기계를 정성껏 닦았다. 이것은 결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쇼가 아니다.
사운을 걸고 몇백억 원을 투자해서 들여 놓은 기계는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내 얼굴보다 그 기계가 더 소중하기에 자연스럽게 내 주머니의 손수건으로 기계를 닦은 것이다. 문제라면 그 정밀 기계를 닦기에 내 손수건이 너무 거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뿐이다.
돌아와서 나는 기계 닦기에 알맞은 극세사 천으로 된 벙어리장갑을 여러 켤레 만들어 공장 설비 곳곳에 비치하라고 지시했다. 공장 사람들이 손수건으로 기계를 어루만지듯 닦았던 회장의 모습을 잊지 않는다면 그 벙어리장갑을 하루에 한 번 낄 것을 두 번 끼게 되지 않을까 하고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