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영사관학교 (60회)

삼영화학은 합성수지 가공업 분야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앞서 읽고 국내 메이저 기업이 되었다. 앞에서 자세히 이야기한 단계적인 필름개발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이는 꼭 첨단 분야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비교적 단순한 사출 성형으로 플라스틱 용기를 만들어 내던 시절부터 나의 화두는 언제나 새로운 시장 개척이었다. 시장 개척의 출발은 숨은 수요를 찾아내는 일이다. 사람들이 어떤 불편을 겪고 있는지를 알아내면 그 불편을 해결할 상품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1960년대 초반에 플라스틱 용기를 만들어 판 업체는 많았다. 그런데 그 제품의 크기는 도토리 키 재기 식이었다. 통용되는 사출기의 규격 한도에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에 나가면 더 큰 용량의 용기에 대한 수요가 분명히 있었다. 팔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대형 용기를 찍어낼 수 있도록 사출기를 만드는 용단을 내렸다.

내 판단은 적중했다. 이제까지 구할 수 없었던 초대용량의 플라스틱 바구니, 박스들은 출고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삼영화학은 이 일로 농산물 유통 선진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마대나 규격화되지 않은 용기에 담겨 유통되던 농산물들이 초대용량 플라스틱 용기에 담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존과 운송 과정의 내용물 파손에 따른 손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대형 플라스틱 쓰레기통도 이때 처음 생산하기 시작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다음 단계로 교통 건설 관계 대형 제품의 수요에 착안하여100온스짜리, 초초대형 사출기를 과감하게 들여왔다. 국제 시장정보를 최대한 입수하여 일본 도시바의 100온스 사출기를 수입했다. 당시 럭키화학이 보유하고 있던 최대용량 사출기는 독일 바텐필드 회사에서 들여온 50온스짜리에 불과했다.

초대형 플라스틱 도구가 시장에 나오면서 아름드리나무를 베어 내야 할 일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를테면 나무를 잘라 만든 작업대(팔레트)를 쓰던 공장들이 삼영화학의 대형 플라스틱 작업대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산림자원 보호와 공장 작업환경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앞에서 사출기 한 대 증설하는 데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기계 수량을 늘리기보다 기존 기계의 생산량을 최대화하는 데에 전력투구했던 나의 자린고비적인 사업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여기서 이야기한 과감한 기계 증설은 얼핏 그와 배치되는 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한마디로 새 시장 개척을 위한 시설 투자는 과감하게, 기존 시장 수요를 맞추기 위한 설비 증설은 신중하게 하는 것이 나의 사업 원칙이다. 물론 폭발적인 수요가 눈앞에 보이면 증산을 위한 기계 증설도 필연적이다. 따라서 항상 지금의 생산역량을 높이는 것보다 기계 증설이 불가피한가 또는 아닌가를 열 번, 스무 번 재검증하고 있다.

삼영화학은 전후 국가 재건기에는 대중화와 대형화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다. 각종 플라스틱 생활용품과 도구류가 그것이다. 그 이후 고도산업화와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정밀화’와 ‘첨단화’로 시장을 선도했다. 포장용 랩에서부터 전자제품용 정밀 . 첨단 . 극초박막 필름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 1986년 삼영요업 제2공장 준공식 / 유공사원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고 있다

1950년 이후 플라스틱 공장들이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부산이었다. 일본과 가깝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때는 플라스틱 사업을 하려면 부산에서 공장을 차리는 것이 상식이었다. 따라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 맨손으로 올라와 소형 사출기로 플라스틱 공장을 차린 나의 행위부터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처음 공장을 차리는 과정부터 기존 플라스틱 업자들의 방해공작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때 1986년 삼영요업 제2 공장 준공식, 유공 사원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고 있다.

그 때문에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은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다. 럭키, 미진, 청강(후에 서울로 옮겨와 우일화학으로 이름을 바꿨음) 등의 기존 플라스틱 회사들은 삼영화학보다 여러 해 앞서 시작했지만 모두 본거지를 부산에 두고 있었다. 여기서 역발상을 했다. 삼영화학 은 그들의 본거지 부산에서 훌쩍 벗어나 서울에서 새출발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발 주자의 핸디캡을 지역적인 우위로 만회하며 더빠르게 도약할 수 있었다.

공장을 부산에서 서울로 이전한다는 것은 지금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방과 서울의 경제적 격차가 컸고, 숙련된 직공들의 생활 터전이 부산인데 그들을 모두 서울로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삼영화학은 요즘 말하는 지역적 블루오션을 서울에서 찾은 것이다. 플라스틱 생활용품, 비닐 장판, 우레탄 스펀지, 의자에 천 대신 입히는 ‘레자’류 등 합성수지 가공품의 종합 생산업체로서 먼저 서울에 자리 잡은 삼영화학은 자연히 한국 합성수지 가공 기술자의 중앙양성소가 되었다.

서울 일원의 합성수지 가공업과 연관된 공장치고 삼영화학 출신의 기술자가 없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동종 업계에서 ‘삼영 화학출신이면 확실하다’는 평판이 났기 때문이다. 삼영화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화학 만능 시대의 합성수지 가공기술 사관학교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나간다는 것은 기술이 빠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렵사리 훈련시켜 제대로 키워놓은 쓸 만한 인력 중에도 머리 좋은 사람만 빼가는 경우를 숱하게 경험했다. 회사 차원에서는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하지만 기업의 세계에서는 우수한 인력을 탐내어 서로 빼가고 다시 빼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정글의 법칙’으로 되어 있었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을 위해 필요하다면 경쟁 회사의 유능한 인재를 스카우트 하는 것은 자본주의 경쟁사회의 당연한 생리인지도 모른다. 요즘 같은 산업기술 보호나 지적재산권 보호와 같은 제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때여서 더욱 그랬다. 최대한 잘 빼앗아 오고 최소한으로 빼앗기는 것, 빼앗김으로써 발생하는 인력과 기술의 공백을 사력을 다해 메워나가는 것이 바로 경영자의 역할과 능력이었다.

삼영화학 사람들끼리는 10년을 근속하면 농담 삼아 “삼영대학원 나왔다”고 말한다. 그 말에는 회장의 지독한 담금질을 견뎌내며 10년에 이르렀다는 의미도 담겨 있을 것이다. 삼영대학원을 나와 삼영화학에서 실용 박사(숙련기술자)까지 따고 그 후로도 오래도록 근속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다. 그런가 하면 삼영대학원 간판을 기반으로 하여 더 유리한 조건을 내건 경쟁 회사로 옮겨가 지금까지 활약하는 사람들도 있다. 넓게 보면 이 모든 인력으로 대한민국의 합성수지 가공업이 오늘날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삼영사관학교’ 교장으로서 나의 성취감은 더할 수 없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