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 석에 앉아 있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왜 비즈니스 석으로 가시지 않느냐'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지부동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전부터 “이종환 씨는 고급차만 탄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 이야기는 나의 겉모습만 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앞에서 말한 대로 남이 몇 해 타던 중고차를 새 차 가격의 3분의 1도 안 주고 사서 타는 것이다. 한 번 사면 또 오래 탄다. 지난 1980년 국보위 시절에 나보란 듯이 타고 다녔던 벤츠도 아직까지 타고 있다. 30년이 넘는 세월이다.
나는 오늘까지 운전대를 한 번도 잡지 않았다. 조그맣게 제조업을 시작해 몇 안 되는 직원을 데리고 동분서주할 때도 운전대는 잡지 않았다. 당시 해마다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가 약 1만 명이고, 부상자는 그 몇 배가 된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운전대 잡는 일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운전은 아예 배울 생각조차 안했다. 지금도 운전면허증이 없다. 그 대신 믿을 만한 운전기사를 한 번 정하면 여간해서는 바꾸지 않고 그에게 나의 안전을 맡긴다. 그래서 내 차의 운전석은 보통 10년 이상 한 사람이 지킨다.
인간은 늘 이율배반의 존재인가? 운전에 대한 내 태도만 해도 그렇다. 언제나 안전, 안전, 또 안전을 당부하면서도 차선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내 차 앞으로 난폭하게 휙 끼어드는 거리의 무법자가 나타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기어코 저 차를 따라잡으시오.”
나도 모르게 이런 무모한 말을 내뱉게 되는 때가 가끔 있다. 나 스스로에 대해 엄한 만큼 남에게도 엄하게 하려는 심리가 무의식중에 발동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는 나의 성격도 여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과는 맞지 않는 처신이다.
나는 같은 돈이라면 새 차보다는 튼튼한 중고차를 선호했고, 안전에 조금이라도 더 공을 들인 고급차를 선택했다. 1978년에 고려애자라는 난제를 붙들고 난 뒤부터 본사가 있는 서울에서 공장이 있는 마산을 한 해에 50~60번도 더 왕복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다는 게 수월하지 않았다. 여러 해 동안 긴 시간을 승용차 안에서 보내야 했기에 더욱 차의 안전성에 신경을 썼다. 좋은 기사를 오랫동안 곁에 두고 튼튼한 차를 잘 골라 탄 덕인지 50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웬만한 고속도로나 국도를 다 누비고 다녀도 교통사고 난 적이 한번도 없다. 하늘에 늘 감사를 드린다.
지금 타고 있는 볼보는 내 나이 일흔에 처음으로 산 새 차다. 나는 승용차를 회사 업무용과 개인용 등으로 여러 대 가지고 있다. 업무적 필요성이나 안전성 또는 의전 문제 때문에 자주 바꿔 타고 다닌다. 무슨 차를 그렇게 여러 대 타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그것이 더 경제적이다. 차 한 대의 수명이 다하고 나서 다른 차를 사면 차의 수명도 짧아지고 오래도록 같은 차만 타야 된다.
그러나 여러 대를 번갈아 타면 차의 수명도 늘어나고 새로운 기분이 든다. 또 전용 운전기사나 운전을 할 직원이 없을 경우 영업용 택시도 마다 않고 탄다. 극과 극인 셈이지만 회사 인력을 따로 빼앗지않는 것이 실리적이기 때문이다. 가끔 미리 연락도 없이 영업용 택시를 타고 지방 공장에 불쑥 나타나면 모두 당황해서 난리다. 경제성도 좋지만 안전을 생각해서 영업용 택시는 피하는 것이 좋다는 간부들의 건의가 있지만 아직 거기에 따르지 않는다.
비행기 여행을 할 때도 그렇다. 값싼 이코노미 석이 원칙이다. 미국이나 유럽, 호주 등 장거리 여행을 할 때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최근에야 비즈니스 석으로 바꾸었다. 이코노미 석에 앉아 있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왜 비즈니스 석으로 가시지 않느냐”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지부동이다. 나는 이미 100만 마일 클럽에 가입되어 있다. 가끔 승무원이 알아보고 비즈니스 석에 빈자리가 있으니 그냥 옮겨 앉으시라고 권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중히 거절한다.
비행기를 탈 때 비즈니스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보다 형편이 좋아 보이는 것 같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자기를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 보이게 하려는 거품 현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지난해 우리 삼영그룹으로 영입한 임원 한 분과 함께 일본 도쿄에 업무 겸 관광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 임원은 모처럼 회장을 수행하게 되니 자유롭지 못한 점도 있겠지만 편안한 여행이 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쿄 가는 비행기 탑승에서부터 실망을 안겨 줬다. 나와 함께 이코노미 석에 앉았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도쿄시내로 들어가는 것도 여행 가방을 하나씩 끌면서 지하철을 이용했다. 시내 관광을 할 때도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지하철로 이동했다.
또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이동했다. 그 대신 빨리 움직였다. 그래야 짧은 시간 내에 더 많이 그리고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체구가 비교적 큰 편인 그 임원은 상당히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 점심식사때는 전철역에서 벤또(도시락)를 산 다음 객차 안에서 먹었다. 숙소도 고급 호텔을 잡지 않고 내가 잘 아는 일본 전통 여관을 이용했다. 숙소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편의점에 들러 페트병에 든 생수를 몇 개씩 샀다. 숙소 냉장고에 있는 생수보다 값이 두세 배 싸기 때문이다. 숙소도 방 하나를 같이 사용했다.
그 임원은 여러 고위직을 거친 분이었다. 그래서 이번과 같은 고된 해외여행은 처음 겪는 것 같았다.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여행이었지만 돌아와서는 몸살을 앓다시피 했다. 그 임원은 출장을 다녀온 뒤부터 “절약이 생산이라는 것을 실감했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본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그룹이 IMF 때에도 흑자 경영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잘 체득했던 것 같다. 마침 그 뒤부터 회사의 경영상 어려움도 잘 풀려나갔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다. 거품은 역시 빼야 하는 것이 맞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