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큰 구두쇠-1 (65회)

2002년 관정교육재단이 공식출범하자 뜻하지 않은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었다. 번거로운 마음에 제주도로 피해 갔지만 거기까지 나를 만나겠다고 내려온 기자가 있을 정도였다. 거절로 일관하는 것도 세상의 관심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다 싶어서 몇몇 인터뷰에 응한 결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자장면 회장’이 되어 있었다. 3천억 원을 세상에 내놓은 ‘큰손’이 점심은 자장면으로 때우고 고작해야 삼계탕 정도를 특식으로 삼는 구두쇠더라 하는 식으로 기사마다 자장면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기자들이 나를 만나러 삼영화학 회장실에 들어설 때부터 의외라는 듯 방안을 둘러보곤 했다. 수천억 원을 내던진 재산가의 집무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거액의 기부자가 사실은 한 끼에 4~5천 원짜리 자장면을 즐겨 먹는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기자가 받은 검소한 인상을 부각시켰던 것이라고 이해한다. 또 그래야 기사가 되겠지 받아들이면서도 실상과 너무 다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구두쇠처럼 보였을지는 몰라도 진짜 구두쇠는 아니다. 스스로 불필요한 지출은 삼갈 뿐, 돈 지갑을 열어야 할 때는 과감하게 열었다. 무조건 싼 것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점심으로 맛있으면서도 값싼 자장면을 즐길 뿐이다. 그러나 싸다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좋아한다는 것이 먼저다.

나는 평생 열심히 일해서 이룰 만큼 이루었고, 이제 기업 인생을 마무리할 나이에 이르렀다. 애당초 여유와 안락 쪽에 취미가 없이 살아온 것은 사실이다. ‘자장면 회장’ 소리를 들을 만큼 나 스스로 엄한 면도 있다. 그러나 남에게 지독하게 구두쇠 노릇만 하며 메마른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맛있는 자장면은 내게 그저 간편한 한 끼 별미일 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호텔 식당 출입도 하고 포도주를 곁들여 맛난 스테이크를 즐길 줄도 안다. 지나치지 않는 수준의 좋은 옷, 좋은 음식을 즐기는 여유도 스스로 허용하며 산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허례허식이다. 체면치레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돈 쓰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내 방식대로 먹고, 내 방식대로 입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 눈에는 내가 구두쇠처럼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보는 데야 어쩔 수 없다. 사실 나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일 뿐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의외로 보일만한 행동도 없지는 않다.

▲ 백범문화상 상패. 2004년 사회공헌과 인재 양성의 공로로 백범문화상을 수상했다

나는 해외여행을 수없이 했지만 평생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이용해 왔다. 지금도 몸 상태가 아주 안 좋을 때만 비즈니스 석에 앉는다. 그래서 나의 이코노미석 에피소드를 조금 더 소개하는 것도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느 날 공항에서 동행인과의 대화다.

“아니 어떻게 회장님이……. 표 좀 주십시오. 제게 마일리지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비즈니스석으로 바꿔드리죠.”

“허허, 거기 앉으면 더 빨리 갑니까? 내 마일리지는 1백만이 넘소.”

자장면과 같은 이치이다. 한 푼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서 불편해도 꾹 참고 이코노미석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비싼 자리라 해서 더 좋은 점이 무엇인지 모르겠기에 이코노미 석을 선택하는 것이다. 흔히 이코노미 석이 비좁다고 하는데, 비딱하게 기댄 자세로 앉으려 하니까 무릎이 앞좌석에 걸려서 그럴 뿐이다.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는 게 가장 편안하고 척추에도 좋다고 한다.

특히 국내선이라면 항공편을 꼭 이용해야 할 만큼 시간을 다투는 일인지 따져 보는 것도 습관이다. 나뿐만 아니라 회사 직원들도 긴급 상황이 아니면 KTX나 일반 기차 또는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내가 오랫동안 교육시켜 온 결과다.

익숙한 일본 여행길에서도 국내에서와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움직인다. 신칸센과 일본 국철을 애용하고 식사는 역에서 파는 ‘벤또(도시락)’를 애용한다. 일본 여행을 하면서 기차 안에서 지역 특산물 반찬이 담긴 ‘벤또’를 사먹는 것은 절약 이전에 여행의 또 다른 멋이다.

바쁜 일상에서 끼니마다 식도락을 추구할 수는 없는 일,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서 한 끼 해결하면서 특별한 메뉴를 찾으면 돈 쓸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럴 때는 남들이 먹는 가장 평범한 메뉴를 선택하는 게 현명하다. 메뉴판을 볼 때 비싼 음식들이 나와 있는 페이지에는 아예 눈을 주지 않고 넘겨버린다. 음식 종류가 적힌 왼쪽 줄보다 가격이 적힌 오른쪽 줄을 먼저 보는 습관도 있다. 먼저 합당한 가격대의 음식 종류를 파악하고, 그 중에서 내 입에 맞는 것을 고른다.

평소에 즐겨하는 식사는 5~6천 원짜리 백반이다. 솜씨 좋고 인심 좋은 어느 식당의 주인아주머니가 밑반찬을 정갈하게 장만해서 내주는 백반이 나에게는 최상의 성찬이다. ‘이렇게 차려주고도 남는 게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만큼 다양하고 푸짐한 반찬을 깨끗이 비워낼 때, 그 한 끼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근사한 나의 성찬(盛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