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펠러와 나-1 (67회)

시장경제론을 연구하는 한 경제학자가 재산을 사회에 내놓은 대표적인 사례로 나를 자세히 알고 싶다며 찾아온 적이 있다. 다음은 그와의 첫 대화 내용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사회에 내놓으실 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결심까지가 어려웠지 막상 다 출연하고 나니까 속이 후련합디다. 얼마나 개운한지 늘 먹는 똑 같은 밥도 예전과 달리 아주 잘 넘어갑니다.”

정말이다. 말이 좋아 기부이고 사회 환원이지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어찌 보면 나도 사업하는 수완을 빼놓고 나면 평범한 사람이다. 당연히 사회 공헌이라는 용단도 한 순간에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타고난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리 쉽게 할 수 있겠는가? 8천 5백억 원, 그것을 어떻게 모은 돈인데 사회에 아무 조건 없이 던지나 하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나에게는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장학 사업에 대한 순수한 원초적 동기가 있었다. 어린 시절 전통적 시골 양반 가문에서 남에게 베풀고 살아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꿈을 꾸며 자랐다. 일제 식민지 지배 시 도시로 나와 받은 일본식 엘리트 교육과 일본 제국주의 학병으로 소 . 만 국경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환경 적응 능력을 키웠다.

해방된 신흥 조국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제조업을 통한 산업보국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후 적자생존의 본능에 따라 다른 사람과 경쟁하면서 치열한 기업인의 삶을 살았다. 미수(米壽)를 넘긴 나이에 내 인생을 되돌아보니 적지 않은 돈을 수중에 움켜쥔 작은 목적은 달성했지만 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이상과 꿈은 제대로 이룬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대규모의 장학재단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여러 가지 법률적 제약과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이 사회를 위해 정말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는 단순 논리로 정리하니 마음이 후련했다. 빈손으로 왔다가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빈손으로 돌아가리라. 그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명분이었다.

▲ 2008년 5월 13일 삼영화학 창업 50주년 및 자서전 출간 기념식에서 축하떡을 자르고 있다 / 왼쪽부터 박진 의원, 박희태 의원, 필자

혹시 나와 비슷한 결심을 하게 될 기업가가 있다면 그 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내가 고민해야 했던 사항들을 좀 더 상세하게 털어 놓겠다. 평생 온갖 시련을 이기고 재산을 일군 사람일수록 하늘의 부름을 기다리는 나이에 이르게 되면 재산 처리 문제가 가장 큰 난제로 다가온다. 때문에 나도 그것이 어떻게 번 돈인데 아무렇게나 처리할 수 있느냐는 고민과 갈등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더니 재부우환(財富憂患)에 시달려야 했다.

가족에게 상속하면 간단하다고 할지 모르나 잘못하면 당대 아니면 그 다음 대에 망하는 경우도 흔히 보았기 때문이다. 삼호무역이니 한일합섬, 국제그룹, 서울통상, 진양화학, 대한농산, 미진, 동명목재, 연합철강, 동아건설 등 굴지의 재벌들도 2세 경영 또는 그 전환 과정에서 무너지고 만 것 아닌가? 또 상속을 법대로 정직하게 하면 절반가량을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경영권까지 위협받을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최고이자 세계적 기업인 삼성까지도 증여세 문제 등으로 시련을 겪고 있는데 법대로 할 경우의 경영권 위협의 우려가 있어 이를 피하려다 빚어진 것이다. 아무리 안정된 기업이라 하더라도 변화와 혁신의 물결을 타지 못하면 몰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미국의 경우 1896년 최초로 다우존스지수 대상에 오른 12개 기업 가운데 1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제네랄 일렉트릭 하나뿐이다.

따라서 다음 세대 아니 다음 세기까지 지속되길 바라는 창업 1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기업이념이 대한민국의 백두대간 역할을 오래오래 담당해야 한다고 기원해 마지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으로 키를 돌려야 하는 것일까. 몇 해를 그렇게 고민해왔다. 불면의 밤이 이어졌고, 자다가도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날이 잦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용단을 내렸다.

그것은 내가 일찍이 구상했던 장학재단의 설립이다. 2000년 6월의 일이다. 장학재단을 통해 재산을 사회에 출연하면 그때부터는 내 개인 재산이 아니다. 사회의 것이 된다. 우리의 공익법인에 관한 법이 엄해져서 한 번 출연된 재산은 개인 재산으로 다시 바꿀 수 없다. 또 부실화되면 국고로 귀속된다. 따라서 반영구적인 존속이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이 장점이다. ‘노벨재단’을 보라. 한 세기 이상을 가고 있지 않은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다. 나도 그렇게 만들어 놓고 가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 결단은 어느 누구와도 상의한 적이 없다. 또 상의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오로지 홀로 내린 고독한 결단이다. ‘후손에게 한 광주리의 황금을 물려주느니 한 권의 경서를 더 읽혀라’라는 것이 우리 집안의 오랜 가훈이라고 했는데 장학 재단의 설립이 바로 그 가훈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 ‘눌언민행(訥言敏行), 말은 천천히 하되 행동은 민첩하게 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처세 원칙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