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펠러와 나-2 (68회)

결단이 서고 나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재산을 정리해서 재단에 넣는 절차를 숨 가쁘게 밟아나갔다. 내 마음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건씩 넣을 때마다 내 재산은 줄어들었지만 내 마음은 더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사람들은 나를 바보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베풂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인생은 어차피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또는 ‘빈손으로 왔으니 아무것도 채우지 않고 빈손으로 가면 된다’, ‘빈손으로 왔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다 빈손으로 가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빈손으로 왔다가 손을 채운 다음 갈 때는 빈손으로 가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나는 바로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서울 소공동 삼영그룹 본사 건물인 삼구빌딩(2008년 부터 삼영빌딩으로 개칭)을 내놓을 때는 말할 수 없이 아쉬웠다. 현판을 쓰다듬으면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눈물을 비치는 감회에 젖기도 했다. 나에게 삼구빌딩은 그저 서울 시내에 수없이 솟아 있는 건물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 건물은 내 사업의 전부이자 이종환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옛 미도파(오늘의 롯데 영플라자)에서 조선호텔로 가는 소공동 사잇길 중간에 위치한 이 건물은 1980년에 매입할 당시 서울의 노른자위 땅 위에 세워진 빌딩이었다. 230평 대지에 건평 3,300여 평의 16층짜리 흰 빌딩으로서 그 근처에서 모양도 제일 빼어났다. 자손 대대로 물려줄 생각으로 산 빌딩이다.

남의 건물 셋방 시대를 청산하고 처음으로 버젓하게 내 건물에 사무실을 열었을 때 느꼈던, 내 집을 마련한 가장과도 같은 흥분과 기쁨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에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장학재단을 만들 수 있는 재산을 일구게 해 준 빌딩이다. 이것을 20여 년 만에 재단에 넘겨주려니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평소에도 ‘회사는 창업주 개인의 왕국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 왔다. 나도 한 아내의 지아비이고 사랑하는 자식들의 아버지다. 가족에게는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고 가면 된다. 그다음은 본인들의 책임 아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나가도록 해야 진정한 자기 것이 될 것이다. 나의 가족들도 이러한 뜻을 잘 이해하고 나의 재산 출연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이렇게 정리하니 그 빌딩도 쉽게 내놓을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내 생명과도 같은 소공동 빌딩도 내놓았는데 뭘 더 망설이랴, 내가 이렇게 내놓는 것은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니 즐겁기까지 하다.

▲ 2008년 5월 13일 삼영화학 창업 50주년 및 자서전 출간 기념식에서 축하떡을 자르고 있다 / 왼쪽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 아내, 김재순 전 국회의장

그러나 내 기업 인생에서 정말 내놓고 싶지 않은 것을 반강제로 빼앗겼을 때에는 힘들었다. 1970년대 초 내 모든 힘과 지혜와 경륜으로 세운 국제전선을 제대로 가동해 보지도 못하고 호랑이 입에 넣어 주어야 했던 이야기다. 그런데 쓰라린 경험과 울분으로 평생 가슴 속에 담고 살아왔던 국제전선 건도 장학재단을 세우고 다져나가면서 그 상처가 아물어 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모든 것을 내놓으니까 마음속으로 놓지 않고 있던 끈도 놓아버리게 된 결과라는 생각도 든다.

‘그때 내가 원하던 대로 사업이 확장되고 대재벌급 부자가 되었다면 지금보다 더 큰 것을 내놓고 마음을 비울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더 큰 것을 계속 차지하기 위해 오히려 내놓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 스스로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재산의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 나 혼자의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나보다 100배나 더 큰 대재벌 회장들이 부의 사회 환원을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 그런 것도 같다.

나도 크면 큰 대로 더 크고 싶은 욕망의 바퀴에 몸을 실은 채 앞만 보고 달렸을 수 있다. 내가 가진 8천 5백억 원 재산에 다른 사람의1 천5백억 원을 더 채워 1조 원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석유왕 록펠러의 전기 《거인(TITAN)》을 일본 번역판으로 몇 번이나 통독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전 재산은 물론이고 지금보다 훨씬 큰 재산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록펠러는 1839년에 태어나서 1937년에 9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인생의 전반기는 돈만 아는 악인으로, 후반기는 천사 같은 선인으로 살다간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내 인생의 55년은 항상 쫓기듯 살았다. 그러나 나머지 43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록펠러가 세상을 뜨기 전에 남긴 말이다. 그는 또 자선사업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의 자신의 삶을 빗대어 이런 유명한 말도 남겼다.

“돈 밖에 가진 것이 없는 자는 태양 아래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그 말의 의미를 나는 누구보다 공감하고 있다. 그의 전기를 보면 세계 제일의 부자 소리를 듣던 록펠러도 유명한 구두쇠였다. 그의 공장 식당마다 같은 식사인데도 값이 6.62달러에서 13.35달러까지 차이가 나는 것을 보고 식당 지배인을 야단치기도 했다. 자기 수목원에서 기른 나무 가격이 한 그루에 10센트밖에 안 됐는데 2달러에 팔았다고 좋아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세계적 거부가 될 수 있었고 또 자선가도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