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대한민국이 1997년에 IMF 치욕을 당하기 3년 전의 일이다. 일본의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국립중앙박물관을 과거 치욕스러운 일제의 잔재라며 폭파시켜 버렸다. 폭파하는 비용에 박물관 소장품을 임시로 다른 곳으로 먼저 옮기는 비용, 용산에 새 박물관을 건립하는 비용 그리고 그곳으로 소장품을 다시 옮기는 비용 등 모두 몇 천억 원이나 됐다.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웠다.
분명 일제의 상징 건물을 부숴버리는 것은 속 시원한 일이다. 사실 통쾌하기도 했다. 일제하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 같은 나이 많은 세대들의 통쾌감은 젊은 세대들보다 훨씬 더했다. 그러나 세상사를 꼭 그렇게 풀어가야 하는 것일까? 우리 앞에 산적한 일들의 우선순위로 볼 때에 과연 그 일을 그렇게 서둘러서 해야 했는지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1992년 한ㆍ중 수교 직전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청나라 말 일본 괴뢰 정부 때 세워진 만주의 창춘(長春) 중앙청사를 시찰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청사가 아직도 지린(吉林)성 공산당 정부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제에 대한 반감은 우리에게 못지않고 명분이나 이념상으로도 일제 잔재를 더 용납하지 않을 듯한 중국 공산주의가 어떻게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생각은 “일제의 상징 건물이면 어떤가? 쓰는 사람의 정신의 문제일 뿐이다. 활용할 수 있을 때까지 사용한다. 부술 돈이 있으면 다른 급한 일에 우선 쓰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정책과 실용주의 정책에 따라서 한 것이 아니라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될 때부터 그런 것이라는 데서 더 놀랐다. 1994년 우리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철거되는 것을 보는 나의 심경은 더욱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를 청산하려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충정은 이해하면서도 ‘순서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너무 성급했다는 나름대로의 느낌은 곧 증명 되었다. 그 3년 후에 IMF 사태를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몇 천억 원의 그 돈을 우선 국제 경쟁력 강화와 과학기술 개발에 쓰고 세계 1등 인재 육성에 투입하는 게 훨씬 더 현명한 투자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 창출된 경쟁력과 과학기술로 투입된 돈의 몇 십 배, 몇 천 배를 번 다음에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국립중앙박물관을 헐고 새 박물관을 지어도 결코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IMF 사태를 당하더라도 충격이 덜했을 수 있을 것이다.
옛 총독부 건물 하나 서둘러 부숴 없앤다고 쓰라린 일제 치하 36년의 역사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아본 우리는 안다. 힘이 없어 악랄하게 짓밟힌 것인 만큼 억울하면 힘을 먼저 길러야 한다. 힘은 팔뚝이나 장딴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머리에서 나오고, 앎에서 나온다.
요즈음 광화문 앞을 지날 때면 속이 시원하고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을 갖는다. ‘일제의 상징물을 이왕 헐 것 빨리 잘 헐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역시 김영삼 대통령이니까 가능했던 그 결단력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순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내가 전 재산을 던지다시피 해서 세계 1등 인재 육성을 위한 장학 사업을 서두른 동기도 여기에 있다. 나라가 인재 양성에 충분히 힘을 쏟지 못한다면 나만이라도 개인적인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장학금의 가시적인 효과가 당장에는 나타나지 않겠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그 몇십 배, 몇천 배의 수확을 거두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앞에서 나는 노벨상 수상자급의 세계 1등 인재를 키우자는 게 내가 관정교육재단을 세운 가장 큰 목표라고 기술하였다. 나라 살림이나 기업 살림이나 개인 살림이나 모두 돈이 키워 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모든 살림을 키우는 것은 돈이나 재산이 아니라 사람이다. 아무리 큰 재산을 물려주어도 후계자나 회사 경영인 또는 승계 자손이 잘못하면 다 까먹고 마는 법이다.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은 이미 장사의 목표가 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사람이 최우선이다. 인재를 먼저 키워야 한다. 특히 세계화 시대라고 하는데 우리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최고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과연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 국내의 대학들이 아직도 세계의 유수 명문대들과 경쟁하기에는 수준 차이가 있다. 국가에서는 우리 대학들의 수준을 높이는 일에 모든 정책적 노력을 해야겠지만 우리 같은 민간 분야에서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그러니 영재들을 많이 발굴해서 기른 다음 그들로 하여금 세계 각국의 우수한 인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하도록 해외 유학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 국내 대학이 세계적 수준에 오를 때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일에 우리 재단이 앞장서야 한다는 게 나의 철학이다. 세계 1등 인재를 잘 키우면 여기 투입된 재산의 몇천 배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쉬운 것을 잘 실천할 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덜 내고 더 많은 재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줄까?’ 하는 궁리만 한다. 이런 실정이니 기업가나 성공한 사람, 부자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날 리 없다. 나는 재단의 장학생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강조한다.
“관정장학생 여러분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엄정한 기준에 따라 선발되었습니다.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여러분의 큰 꿈을 반드시 이루십시오. 여러분의 꿈이 곧 나의 꿈이고, 우리나라의 꿈입니다.”
우리 재단의 장학금으로 공부한 장학생들은 장차 개인의 꿈뿐만아니라 우리나라와 인류의 장래를 끌고 나갈 꿈을 펼칠 것이다. 나도 전 재산을 내놓은 대가로 그 훌륭한 인재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니 천하를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관정교육재단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라도 나라와 인류에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이 줄줄이 나와서 이런 말을 한다면 얼마나 흐뭇할까? 하는 상상을 자주 한다. 그때는 활자의 빛과 전파의 속도가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가게 하는 과학기술도 개발되어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내 눈에 비치고 내 귀에도 들리게 해 줄 것이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이미 즐겁다.
나는 우리 아이들의 출중한 자질과 아름다운 품성을 마음속 깊이 신뢰하고 있다. 그 상상이 현실로 나타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특히 2002년 출범한 이후 관정장학금을 신청하는 학생들의 수준이 해마다 높아져 이제 최우수 인재들만의 경쟁의 장으로 자리 잡은 것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나는 삼영화학에서 관정교육재단에 이르기까지의 내 일생을 관통하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3C로 요약해 보았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에 뛰어드는 도전정신(Challenge),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내는 창조정신(Creation) 그리고 애써 번 돈을 아낌없이 사회에 돌리는 기여정신(Contribution)이다. 후세에 내가 이 3C 정신의 실천을 위해 살다 간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면 더 없는 영광일 것이다. 사실 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관정장학금과 함께 이 3‘C 정신’을 물려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