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불합리한 세법 현실을 직시하면서, 공장을 세우려면 먼저 도로를 닦아야 하듯이 장학 사업을 제대로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세법을 고치는 일이 앞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연 과정에서 현행 세법의 적용을 받아 이미 납부해야 할 세금은 납부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세법을 고쳐 우리 재단만 감면 혜택을 받자는 게 아니라 공익사업에 뜻을 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보다 쉬운 길을 낸다는 대의명분에서였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 중에 사회 공익사업에 뜻을 둔 사람들은 나 말고도 많이 있을 것이다. 다만 실천에 옮기기를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주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세법이다. 나는 전 재산을 다 내놓기로 했으니까 이 나라 기부 문화의 초석을 놓는다는 마음으로 하면 된다. 그러나 훗날 같은 문제에 봉착할 사람들을 떠올리며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다. 복잡한 절차와 불합리한 세법이 기부에 뜻을 세운 사람들을 뒷걸음질 치게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라 생각한다.
“나는 길 없는 길을 오느라 불편과 불이익을 겪었지만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길을 제대로 닦아 놓고 싶소. 내가 나설 수밖에 없어요. 세금 제도가 기부 문화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바로잡을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내가 뒤에서 밀어줄 테니 여러분이 앞에서 뛰어주시오.”
2003년 여름 어느 날, 나는 재단 차원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지시했다. 우리는 장학법인과 학교법인, 복지법인에 대한 비교 논리로 우리 논리의 타당성을 입증해 보였다. 사학재단은 등록금을 받고, 복지재단은 후원금을 받고 있다. 또 한편으로 정부로부터 예산지원을 받기도 한다. 종교단체도 헌금 수입이 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 면세되고 있다.
그러나 장학재단은 그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장학금을 주기만 하는데 더 많은 세금혜택을 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세금 감면 혜택에서 심한 차별을 받고 있다. 이를 시정해 달라는 논리를 폈다. 누가 봐도 타당성이 있는 논리였다. 정부와 여야 의원 그리고 여야 정당 간부 등 다방면으로 설득해 나갔다. 국회 쪽은 비교적 설득이 잘 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재경부와 행정 자치부 쪽에서 난색을 나타냈다. 세수 감소와 다른 공익재단들의 반발 가능성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우리는 전략을 조금 수정했다. 우선 법인세의 현행 50퍼센트 감면에서 100퍼센트 감면하려던 목표를 80퍼센트 감면으로 낮춰 잡았다. 그리고 그 해에는 법인세법만 고치도록 하고 지방세법 개정은 이듬해로 미루기로 했다. 수정안 전략은 적중했다. 2003년 정기국회에서 공익법인 가운데 장학법인에 대해서만 법인세의 50퍼센트 감면에서 80퍼센트 감면으로 감면 폭을 높여 주는 법인세법 개정안을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주었다. 세법 개정은 적어도 2~3년은 걸리는데 불과 석 달 만에 해낸 것이다 나의 큰 그림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전국 1,600여 장학법인 또는 단체들로부터 감사전화를 많이 받았다.
우리 계획대로 그 이듬해에는 지방세법 개정을 추진했다. 법인세와 같은 논리로 장학법인에도 학교법인 수준에 버금가는 세금 혜택이 주어지도록 국회를 설득했다. 100퍼센트가 아니면 법인세 80퍼센트 감면과 같은 수준의 지방세 감면이라도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장학법인의 임대용 부동산에 대한 면세 혜택을 되살려 내는 데 역시 성공했다. 100퍼센트나 80퍼센트 감면이 아닌 50퍼센트 감면 혜택에 그쳤지만 공익법인 중에서도 장학법인만이 얻어 낸 혜택이었고, 세법의 불합리성을 관정교육재단의 독자적 노력으로 시정했다는 데 큰 보람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관정교육재단은 한 해 20억 원 가까운 세금을 감면받게 되었다. 뒤늦게 우리의 노력을 알게 된 다른 장학재단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 이런 일에 장학재단들끼리 연대해서 움직이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오히려 불필요한 잡음이 생길 수도 있어서 우리 재단 독자적으로 조용히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혜택은 모두가 누리게 됐고 앞으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길을 넓혀 주게 되어 흐뭇했다.
특히 이 두 차례 세법 개정을 통해 나라가 해야 마땅할 인재 육성사업을 장학재단이 대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 차원에서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3년 뒤인 2007년 정기국회에서는 지방세의 감면 비율 50퍼센트를 법인세 감면 비율과 같은 80퍼센트로 인상하는 지방세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주었다. 이 세 차례의 세법 개정은 나의 불퇴전의 전략과 추진력으로 이룬 결과다.
세법 개정이라는 목표를 뜻한 대로 달성하고 나니 이제 최대 장학재단에서 최장수 장학재단으로 도약하여 세계 1등 인재, 초일류 인재를 키워나가는 데 전력하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어깨가 무거워졌다. 세제를 통한 소득 재분배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부자가 스스로 보람 있는 일에 자신의 재산을 많이 내놓을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그런 풍토를 조성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세금 경감을 통한 기부 장려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이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일부 모순에도 불구하고 세계 초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개인이나 기업의 재산 기부 문화가 큰 역할을 했다. 록펠러, 카네기(Andrew Carnegie), 포드(Henry Ford)가 그렇게 했다. 오늘의 빌 게이츠가 300억 달러를 내놓는가 하면 워렌 버핏(Warren Buffet)이 거기에 버금가는 액수를 내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런 분위기와 여건을 조정해 준 국가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성서에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지만, 자기 이름을 내걸고서라도 선업을 쌓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면 훨씬 더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국가가 강압적으로 또는 강제로 세금을 많이 거두어 뭐든지 직접 다하려 한 데 있다. 바로 이 점을 국가가 헤아려야 할 것이다. 인간의 건전한 공명심과 잠재적 사회봉사 정신을 북돋우고, 공익사업에 뜻을 둔 많은 사람들이나 기업들이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아직도 선진국에 견주어 볼 때 공익재단에 대한 우리의 세금 감면은 더 늘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기업의 주식을 공익재단에 출연할 때는 총 주식의 5퍼센트 이내에서 할 때만 증여세가 면제되고 그것을 초과할 때는 증여세를 물게 돼 있다. 또 일반 기부금은 소득의 5퍼센트 이내에서 할 때만 세금 감면 혜택을 받게 되어 있다. 법인이 부동산을 출연할 경우 법인세 부담은 그대로 남아 있다.
빌 게이츠가 자기 재산의 50퍼센트를 사회에 내놓겠다고 한 것이나, 페이스북의 저커버그가 보유주식의 99퍼센트를 내놓겠다고 한 것은 미국에서는 주식 출연이 거의 자유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앞으로 공익법인에 대한 제한이나 부담도 대폭 풀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에서도 기부 문화가 활짝 꽃피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