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영화학의 창업 당시 공장 규모는 50평이었다. 서울 제기동의 한 건물 창고에 사출기 한 대를 들여놓고 시작했다. 처음에 플라스틱 젓가락을 생산할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젓가락은 금형이 작아서 사출기에 녹 찌꺼기가 끼면 표면이 매끄럽게 나오지 않았다. 낮에 기계를 가동해 만들어 낸 플라스틱 제품을 동대문 시장에 내다 팔고 돌아오면 밤하늘의 초승달을 바라보며 사출기 내부의 녹을 기름으로 말끔히 닦아 내는 작업을 했다.
아무리 고단하고 잠이 쏟아져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이 밝으면 생산으로 하루를 희망차게 시작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렇게 했다. 간밤에 돌린 기계에서 찌꺼기를 닦아내는 일로 하루의 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이 스스로 용납이 안 됐다. 청소는 늦더라도 당일에 하고 아침은 생산으로 시작한다는 철칙을 아무리 피곤해도 고수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영등포의 오비맥주 공장 건너편으로 확장 이전을 했다. 작업 공간은 제기동의 네 배나 되는 200평으로 늘어났지만 나는 사출기 대수를 늘리지 않고 최대한 버텼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평생의 내 사업 스타일이다. 일이 좀 된다 싶으면 터를 늘려 잡을 수는 있다. 땅은 불변의 자산이어서 능력만 된다면 잡을 만큼 잡아 두어도 후회할 염려가 별로 없다. 빚지고 공장 부지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면 크게 심사숙고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설비투자는 이와 판이하게 다른 문제다. 현재 가동하고 있는 기계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한 극대화하면서, 기계 대수를 늘리지 않으면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 싶은 시기가 도래하기까지 최대한 버틴다.
설비에 투자할 시기가 닥쳤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는 것이다. 시장 수요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생산력이 조금 달린다 싶어서 기계를 더 들여 놓으면 그 동안 쇄도하던 주문이 급감해서 ‘아차’ 하는 순간에 낭패를 보기 십상인 게 제조업이다.
공장은 확장할지언정 기계는 쉽사리 늘리지 않는다는 나의 제조업 철칙은 지금보다 창업 무렵에 더욱 지키기 어려웠다. 지금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면 생산을 늘리기 위해 2교대, 3교대로 기계를 풀가동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때는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공업용 전기가 제한적으로 공급되던 시절이라 전기가 나가버리면 기계를 더 돌리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하루에 전기가 들어오는 시간이 8시간, 길어야 10시간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기 공급이 시작됐다고 곧바로 기계를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예열을 시켜야 했다. 그 작업에만 한 시간 반을 빼앗겼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기계가 돌아가는 시간은 하루 평균 7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공장주들이 얼마나 속이 탔으면 조금 돈이 돌기 시작하자마자 기계 대수부터 늘리려고 했을까?
목표로 한 하루 생산량을 다 채우지 못했는데 전기가 나가버리면 속이 쓰렸다. 주문량을 못 맞추게 되었을 때의 그 답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전기 공급 중단은 제품 불량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합성수지 성형 중에 전기가 끊기면 사출기 내부에 있던 합성수지가 식으면서 덩어리로 엉겨 붙어 버렸다. 그것을 말끔히 긁어내는 것도 고역이거니와 그 작업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새로 가동을 시작했을 때 불량품이 나오곤 했다. 전기가 물이라면 어디 가서 퍼오기라도 하련만 방법이 없었다. 어떤 날은 사출기를 예열하는 데에 드는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져서 답답하고 성질이 나기도 했다.
“전기가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생산에 돌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까? 가는 전기를 붙잡을 방법은 없을까?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사출기가 씽씽 돌아가며 제품을 만들어 내는 방법은 없을까? 이도 저도 안 되고 결국은 기계를 한 대 더 들여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끝내 기계를 더 들여 놓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쪽으로 머리를 썼다. 묘수는 두 차례나 큰 정미소를 운영했던 지난날의 경험에서 나왔다. 정미소를 운영할 때, 45마력 수입 발동기의 벨트가 부러지는 바람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돌아보면 실패한 경험이든 성공한 경험이든 모든 경험은 다 유용하다. 고장 난 발동기를 고치려고 넌더리가 날 정도로 붙들고 씨름을 했던 덕분에 나는 엔진의 원리를 꿰뚫고 있었다.
당시 원효로에 자동차 정비공장들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쓸 만한 엔진을 중고로 구입했다. 모든 기계의 심장이 엔진이며, 따라서 돈을 좀 더 치르더라도 품질이 확실한 것을 달아야지 엔진에 탈이 나면 이만저만 손해 보는 것이 아니다. 정미소 시절에 부실한 엔진으로 인한 고생을 톡톡히 해 본 나는 가게 주인들이 지칠 정도로 꼬치꼬치 캐물어 가장 확신이 가는 튼튼한 엔진을 구입했다.
이 엔진의 용도는 전기가 나가는 순간 그 동력을 이어받아 계속 사출기가 가동되게 해 볼 생각이었다. 정미소 발동기의 원리가 사출기에도 적용되리라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내 생각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전기 공급이 끊기는 순간을 포착해서 재빨리 엔진을 잡아당기면 사출기가 기존의 동력을 이어받아 기운차게 돌아갔다.
잘못 사들인 발동기 때문에 눈물을 삼켜본 내 경험에 의존하여 눈에 불을 켜고 고른 엔진이 아닌가? 말썽 한 번 일으키지 않고 그 뒤로 1년 반 동안 제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전기 공급이 안 되는 시간에도 내내 사출기를 가동할 수 있게 되니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사출기 한 대가 다른 공장 사출기 석 대 구실을 했다. 이익이 증대된 것도 말할 수 없이 흐뭇했고, 내 힘으로 고안한 시스템에 의해서 공장의 생산량을 늘렸다는 뿌듯함은 그 이상이었다.
전기로 돌아가는 기계를 전기가 안 들어오는 시간에도 돌아가게 만들었던 이 사업 초창기의 일화가 보여주듯이, 나는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계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도입하고 가동시키는 만큼 기계를 움직이고 관리하는 사람 또한 효율 제일주의로 움직여 주기를 늘 기대하고 주문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바로 나 자신에게 그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한다. 조직을 섣불리 키우는 것도 극히 삼가는 편이다. 방만한 조직은 비효율의 온상이다. 회장실 조직을 극소화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누군가가 일궈 놓은 기업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데에는 달리 큰 비결이 있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남이 쉴 때도 일한 덕분이다. 휴일을 모르고 일했고 밥 먹는 시간을 아끼며 일했고 잠을 줄여가며 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