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서울 환도 이후 처음 상경하여 빈집을 임시 거처로 삼아 지낼 때의 일이다. 몇 달을 동분서주하다 보니 식솔들을 서울로 불러 들여도 그럭저럭 살 방편이 생길 것 같았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아내와 두 살 먹은 딸을 데리고 올라왔다. 그러나 막상 가족을 데리고 와보니, 내 가족 건사조차 제대로 못 하고 남의 집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게 남부끄러웠다. 내 집을 가져야겠다는 소유욕이 강하게 발동했다.
서울의 주택 시세는 이때 이미 윤곽이 잡혀 있었다. 이를테면 서울 혜화동, 명륜동, 가회동의 몇 평짜리 기와집을 사려면 시골의 몇 천 석 부자는 되어야 한다는 공식이 있었다. 돈암동의 스무 평짜리 기와집은 500석에서 1천 석 이내면 살 수 있다는 식이었다. 어느 지역의 얼마만한 주택을 넘보려면 시골에서 어느 규모의 논밭을 소유한 부자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등급이 은연중에 형성되어 있었다.
또 무슨 기준에 따른 것인지는 몰라도 서울 부자가 집을 살 때와 시골 부자가 서울에서 집을 살 때에 요구되는 등급이 달랐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서울내기들이 타관 사람에게는 가격을 더 높여 호되게 부른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한 일이다.
세 식구가 그 집에서 겨울을 나고 그 이듬해 봄이 되었다. 하루는 혜화동 내가 사는 집 바로 옆집이 집을 내놓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옆집 주인은 파주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를 나와 6.25 직후에 중소기업 중앙회장을 지낸 이구종 씨였다. 당시 그 분은 파주에 살고 있어서 나와는 일면식도 없었고 혜화동 집은 그 분의 아우가 관리하고 있었다.
옆집에 들어가 둘러보니 방이 여섯 개에 집안 구조가 실한 것이 아주 탐이 났다. 이만한 집이면 내놓은 값이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그 집을 꼭 사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둘일 때였다.
“내가 지금 가진 돈을 다 털어서 계약을 하고 석 달 후에 잔금을 치르면 안 되겠습니까?”
쥐꼬리만큼 계약금만 걸고 석 달 후를 기약하자니, 내 어디를 믿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그것은 상식적으로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다. 성질이 급하고 금전 문제에 여지가 없는 사람이었으면 아마 나를 그 자리에서 문밖으로 내쫓아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양반은 내가 간청하고 또 간청을 하면 그때마다 자기 형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주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어느 날 이구종 씨의 아우가 뜻밖의 희소식을 전해 주었다.
“우리 형님이 자네한테 졌소. 그렇게 계약을 하라고 하시네.”
이렇게 하여 매매계약은 이루어졌으나 나는 계약서에 정한 기한 내에 집값을 마련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가진 돈을 긁어모으고 열심히 벌고, 그래도 모자라는 돈은 빌려서 채우기로 했다. 잔금 치러야 하는 날 비는 주룩주룩 오는데 모자라는 액수를 극적으로 맞출 수 있었다. 단숨에 택시를 타고 달려가 집문서를 넘겨받았다. 부채를 지면서까지 마련한 집이지만 나는 밥을 안 먹어도 이미 배가 불렀다. 그 석 달 사이에 집값이 두 배로 뛰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연한 도박이 결코 아니었다. 옆집을 발이 닳도록 들락거리며 석 달 말미를 달라고 졸라댔을 때부터 나는 남보다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물가가 뛰고 있으니, 좋은 값에 나온 집은 우선 잡고 보자는 계산이었고, 그게 적중했던 것이다.
남의 집에 눌러앉아 고지식하게 집 살 돈 모이기만 기다렸더라면 언제 집을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젊은 사람 사정을 헤아려 흥정에서 양보해 준 이구종 씨가 너무 고마워 그 이름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빚으로 내 집을 장만한 후 내가 그 집에서 사용한 것은 오직 행랑채 방 하나뿐이었다. 몸채, 행랑채, 문간방까지 세 가구 세를 들였다.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나 네 식구가 되었어도 행랑채 살이를 한 해 반 동안 계속했다. 이화여대를 2기생으로 나온 아내는 행랑 채 밑에 구멍을 뚫고 솥을 걸어 밥을 하면서 “집 장만을 했다고 달라진 게 대체 무엇이냐”고 불평을 했다. 하지만 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몸채 가장 넓은 공간에는 대구에서 온 사람들이 세를 들었다. 나중에는 서울 사람이 세를 살았는데, 살림살이를 보면 전세를 살아도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 집 지붕 신세를 지는 세입자들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들 사는 게 부러울 까닭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외화내빈이 딱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신기한 것은 행랑채에 살지언정 내 집을 지니고 산다는 생각을 하니 대외적으로 모든 일에 배포가 더 생기고 일이 잘 풀리더라는 것이다. 사업상 누구를 만나서도 넌지시 ‘혜화동 56평짜리가 내 집’이라 하면 그만이다. 누가 호구 조사를 나올 일이 있는가, 행랑채에 살지언정 내 집은 내 집이 아닌가?
집 장만을 하고 나니 타 지역 사람인 나를 아무도 만만히 보지 못했다. 날로 두터워지는 신용을 바탕으로 착실히 일을 해서 조금씩 빚을 갚아나갔다. 형편이 나아지자 몸채, 문간방을 차례차례 내보내고 드디어 우리가 집을 독차지하기까지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