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랑채일지언정 내 집을 가져라-...

그로부터 10년 후에 근처 명륜동에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집을 짓게 된 동기가 있다. 나는 5.16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가난과 부정부패, 사회 혼란을 보다 못해 마침내 군인들이 나섰으니 부디 새로운 정치, 혁신적인 정책을 펴서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가 주었으면 하는 기대에서였다. 내 주변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공무원들이 진한 밤색 ‘재건복’에 운동화를 신고 일했다. 오가며 마주칠 때 나누는 인사말도 “재건 합시다”였다. 시내 양복점들도 쇼윈도에 국가가 착용을 장려하는 이 재건복을 내걸어 놓고 있었다. 나는 국민재건 운동에 적극 동참한다는 뜻에서 내가 드나들던 시청 앞 양복점에 가서 재건복 두 벌을 맞추었다. 정장 대신에 즐겨 입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게 아니다 싶었다. 초기에는 그 옷을 입고 관청 출입을 하면 나 또한 건설적인 분위기에 충만해지곤 했다. 그런데 몇 해 지나지 않아 모든 예전의 관행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급기야 관청 입구에서 내 자신의 복장을 새삼 돌아보며 ‘내가 왜 이 군복 비슷한 것을 이제까지 입고 있나?’ 반문하게 되었다.

5.16후 5년쯤 되는 해에 더 이상 그 옷을 입고 다닐 기분이 나지 않았다. 곧장 장롱 한구석에 처박아 두고는 다시는 꺼내 입지 않았다. 아직도 내 집 어딘가에 그 재건복이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는 역사의 유물이다. ‘재건(再建)’이라는 구호가 패기와 신선함을 잃고 빛이 바래갔다.

어느새 5.16 세력이 썩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받게 되었다. 기업하는 사람은 정치인이나 관료가 썩는 냄새를 일반인들보다는 먼저 맡게 마련이다. 장성 아무개는 한남동 저택에 엘리베이터를 달았다는 둥, 한남동에 가면 군인들만 드나드는 창고가 있는데 그 창고 이름이 ‘도둑고’라는 등, 군인들의 행패와 민심의 동향을 나타내는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서울 시내 곳곳에 아직 판잣집이 즐비한 나라 형편에 군인이 호화판 저택에 산다면 이미 끝장난 것 아닌가? 믿기지가 않아 한 군인의 저택으로 알려진 공사 현장에 직접 가보았다. 과연 참으로 으리으리한 호화 주택이었다.

‘이 나라 부국강병이 벌써 이뤄졌나? 군복 벗은 지 몇 해나 됐다고 군인들이 이런 호화로운 집을 짓는가?’

그 공사장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승용차도 못 들어가는 혜화동 우리 집 앞 골목이 떠올랐다. 그동안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나서 우리 식구는 일곱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렇게 살 일이 아니다. 내 딴엔 국가 재건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자중하며 살았는데 세상 돌아가는 게 그게 아니구나. 애 다섯에 나 혼자 이리 초라하게 산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나도 남들 사는 만큼은 살아야겠다.’

▲ 관정이종환교육재단 본관 / 1969년 지어 거주하던 2층짜리 단독주택을 허물고 2011년 지은 건물이다

내가 그들만큼 경제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하는 억울한 마음에 명륜동에 있는 아흔아홉 칸짜리 기와집을 샀다. 플라스틱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공장이 아주 순조롭게 굴러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집 자체가 많이 낡고 일부 헐린 상태여서 그대로 들어가 살 수 없었다. 바로 그 집에 여운형 씨가 살다가 저격을 당해 비명에 갔다는 사실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알게 됐다. 그 터에 1970년대 초, 내 나이 마흔 일곱 살에 새집을 지었다. 호기를 부린 것이다.

‘군인들이 어디서 큰돈이 나서 대저택들을 짓나? 나는 내가 번 돈으로 당당하게 이 집을 짓는다. 기왕에 짓는 것, 평생 부족함 없이 살게 크게 지으리라.’

그때는 능력만 있으면 집을 짓는 바람이 유행처럼 불고 있었다. 나는 군인들이 큰 집 짓는 데에 상당히 분노하고 있을 때였다. 나도 경제적 능력에 못 미치는 주거 환경에서 오랫동안 내핍 생활을 했으니 이 기회에 삶의 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휴일 없이 일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 사업 현장을 나 몰라라 하고 자기 집 짓는 일에 골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250평 건평을 잡아 뭐든지 널찍널찍하게, 그리고 좋은 자재로 지으시오. 특히 차고를 아주 크게 만들어 주시오.”

내가 원하는 기본 틀만 지시하고 정작 나는 집 짓는 데 별 간섭을 하지 않았다. 집이 완성된 후 보니, 차고가 어찌나 넓은지 승용차 다섯 대가 넉넉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세단 차가 극소수밖에 없을 때다. 차고가 있다고 해야 차 한 대 겨우 들어가게 만들었지 두 대 들어가는 차고도 보기 힘들 때였다. 그야말로 분에 넘치는 고대광실(高臺廣室)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41년을 살았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꿈을 키운 곳도 그 집이요, 내 기업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한 곳도 바로 그 집이었다. 그 집은 내 나이 90을 넘긴 지금까지 국내외의 경영활동을 왕성하게 할 수 있도록 힘을 길러준 충전소이고, 우리 가족들의 편안한 보금자리이며, 나의 기업 활동을 구상하고 전개했던 경영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관정교육재단에 기부하겠다고 공언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가 살던 명륜동 그 집도 재단에 내 놓았다. 뿐만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의 꿈과 추억이 깃든 그 집을 헐고 임대주택으로 개조하여 재단의 수익을 올리게 만들었다.

낸들 왜 애틋한 마음이 없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집만은 남겨두라는 충고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할 것으로 여겼던 가족들이 흔쾌히 나의 결정을 따라주었다. 결정적 순간, 나의 편이 되어주는 우군(友軍)은 역시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