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야마 사부로(城山三郞)는 기업과 비즈니스의 세계를 다룬 여러 권의 책으로 널리 이름이 난 원로 작가다.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무렵에 이 작가가 <남자의 본회(本懷)>라는 제목의 신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일본 여행 중 그 책을 사서 읽으면서 ‘아, 여기 진정한 애국자가 한 사람 있구나!’ 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굳이 다시 서점으로 가서 같은 책을 열두 권이나 더 샀다. 양장 제본의 소설책 열두 권은 여행자에게 결코 작은 짐이 아니었지만 무리를 했다.
우리나라 집권층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내가 전달자의 역할을 기꺼이 자임하고 싶었다.
그 책은 통화 팽창에 허덕이는 일본 경제를 구하기 위해 개혁정책을 목숨 걸고 밀어붙였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1930년을 전후로 한 세계 대공황 직전에 정권을 잡아 금본위제(金本位制)의 복귀와 긴축 경제, 산업의 기계화, 합리화를 통한 경제구조 개혁을 추진하다가 반대 세력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뜬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 수상과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 대장상이 그 중요 인물들이다.
두 사람 모두 동경제대 법과를 나온 엘리트였다. 얼마 못 가 세계대공황에 휩쓸려 이들의 개혁은 참패로 끝났지만 내가 이 책을 열두 권이나 사게 된 것은 그 개혁의 성과와는 별개로 실천 과정에 감복했기 때문이었다.
군벌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이 천황의 불신을 사서 총 사퇴한 후 들어선 내각이 하마구치 내각이었다. 하마구치 내각이 들어섰던 쇼와(昭和) 4년(1929년)의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곤궁에 빠져 있었다. 일본에서도 경제 상황이 가장 나쁜 지역에 속했던 이와테 현에서는 ‘초근목피와 보리죽’으로 겨우 연명을 했을 정도였다.
▲ 일본 작가 시로야마 사부로(城山三郞)와 그의 소설 남자의 본회(本懷)
이것은 일본만의 일이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의 상황은 더 처참했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가난한 집에서는 딸이 아들보다 더 배를 곯아야했다. 쇼와 5년(1930년) 내 나이 일곱 살에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 우리만큼 일본도 곤궁한 때였다. 아무튼 일본에서도 딸을 몰래 팔아넘기는 인신매매가 이루어졌을 만큼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다.
천황이 급작스럽게 다나카 내각을 해산시키고 총리대신으로 세운 하마구치 오사치는 원래 야당 당수였다. 그러나 그는 군벌 여당에서 대장상을 지낸 바 있는 이노우에 준노스케를 다시 대장상에 임명했다. 총리대신 다음 가는 권력이 주어지는 내각의 제2인자 자리를 자신과 정치적 노선을 함께한 인물이 아닌 그 반대편의 인물에게 맡긴 것이다.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경제 난국을 타개하려면 금 수출 금지 조처를 해제해야 하는데, 이 문제를 과단성 있게 추진해 나갈 역량이 있는 인물은 이노우에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게다가 하마구치가 이노우에를 대장상 자리에 앉히기까지는 또 세인의 상식을 초월하는 삼고초려(三顧草盧)의 과정이 있었다. 야인으로 물러난 이노우에는 입각 제의를 극구 고사했고, 하마구치는 직접 이노우에의 집으로 찾아가서 중책을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자기 편 사람을 쓰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만드는 위인설관(爲人設官)이 흔한 일이고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자기 편 사람이 아니면 중용하기를 꺼리는 정치 풍토에서 하마구치의 이러한 행동은 우리에게도 시사 하는 바가 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