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이야기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울지 않는 새는 죽여 버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어떻게 해서든 울게 만들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 대하소설 <대망(大望)>의 첫머리에 나오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호령한 세 장수의 성정. 나아가 세상을 사는 지혜와 방식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목이다.
전국시대 일본을 마지막으로 평정한 사람은 ‘울 때까지 기다리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머리를 숙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듯 했지만 결국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았다. 대들 기회가 많았지만 참고 끝내 기다려서 결국 정권을 자기 손아귀에 쥐게 되었다. 한 마디로 꾀와 인내로 집권한 사람이다. 그래서 정면 승부를 거는 모험 대신 노회한 노선을 택한 도쿠가와가 ‘너구리 첨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세상에는 은근과 끈기로 버티는 사람보다는 성질이 불같고 단칼에 승부하려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따라서 그러한 성정의 상대방을 방심과 무장해제로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전략적 승복이 필요하다.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의 승리 비결은 거기에 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남에게 미련한 사람으로 비치기 쉽지만 사실은 가장 꾀가 많은 사람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 신하가 자기를 보고 원숭이를 닮았다고 하자 화를 누르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보게, 내가 원숭이를 닮은 게 아니라 원숭이가 나를 닮은 걸세.”
반면 오다 노부나가는 성질이 괄괄하기로 이름이 났다. 그는 무로마치(室町) 막부를 멸망시키고 천하 통일의 대망을 달성한 듯했지만 가신에게 배반당해서 스스로 할복해 삶을 끝냈다. 결단력이 강했으나 성정이 불같았던 오다 노부나가나 지략이 뛰어났던 도요토미나 궁극적으로 신중하고 인내심 강한 도쿠가와에게 패한 셈이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일본의 전국시대가 통일되는 과정을 두고 오다가 만들고, 도요토미가 차린 상을 도쿠가와가 받아먹었다고 이야기한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라는 말이 그래서 있다. 이 세 장수의 이야기는 비단 정치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사의 오묘한 이치를 엿보게 해주는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세대로 보나 나의 지난날의 이력으로 보나 나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했고, 아직까지도 일본 지식인들의 주요 저작물 신간이 나오면 거의 빼놓지 않고 섭렵한다. 사업의 도약 단계마다 새로운 분야 진출을 모색할 때, 일본은 나에게 한국의 앞날을 미리 가늠해 보게 해주는 요긴한 창구였다. 일본을 여행할 때마다 풍부한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고, 그곳 업자들과의 활발한 대화를 통해서 돈 주고도 사지 못할 좋은 정보들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은 일본의 문화적 영향을 ‘왜색(倭色)’이라 폄하하고 이에 대해 극단적 혐오를 표현하는 시기를 지나왔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날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벤치마킹할 만한 것이 많은 중요한 상대임에 틀림없다.
내가 평생을 천착해 온 플라스틱 가공 분야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일본은 생활수준과 생활패턴을 비롯해서 우리와 많은 유사점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전후 폐허 위에서 합성수지 가공 분야에 투신했던 내게는 유학 시절을 통한 일본 체험, 자유로운 일본어 구사, 일본 문화에 대한 꾸준한 관심, 깊이 있는 독서가 알게 모르게 큰 강점으로 작용해 왔다고 믿는다.
지난 세월 위정자들이 국민으로 하여금 일본의 존재를 필요이상으로 가볍게 여기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학교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들에게 일본은 아예 배울 부분이 없는 나라로 단정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일본과 접촉하거나 알려고 노력하는 태도 자체를 잃어버렸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대한민국의 장래에 큰 마이너스 요소라고 여긴다. 위정자들이 홀대해 온 일본의 가치를 바로 인식하고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현재의 우리 경제력은 일본의 5분의 1에 못 미치며, 그나마 근자에 이르러서야 이 정도까지 간격이 좁혀졌다고 봐야 한다. 산업에서는 IT 부문에서나 우리가 조금 앞서 있을 뿐인데 마치 우리가 그들을 이미 상당히 앞질러나가고 있는 듯 여기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앞선 것은 배워야 하듯이 일본에서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다만 자주적으로 하면 된다. 일본은 미국과 중국 다음가는 세계 제3의 경제 대국이다.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에 능통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일본의 정보를 선별해서 파악할 만한 일본어 능력을 갖춘 인재는 기업에 필수적이다. 또한 일본의 수백 년 지방분권 주의가 지역 문화와 정치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하는 것도 지방자치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물론 ‘일본을 배운다’는 과제는 확고한 국가관을 전제로 한다. 국가 없는 글로벌 사회는 없다. 우리가 어느 나라에 가서 어떤 활동을 한다고 해도, 그 실적은 개인의 유능함을 떠나 근본적으로 국가의 힘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국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위신을 지켜주는 것도 국가이고, 내 안위를 지켜주는 것도 국가이며, 내 사업적인 성공도 국가가 버팀목이 돼줄 때 가능하다.
우리 민족은 진취적인 면에서 일본을 앞선다. 일본인들은 확실히 소심하다. 왜 소심해졌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체구가 작고, 적게 먹으며 인내(忍耐)하고 사는 방식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는 게 일본 사람들이다. 풍습과 풍토 자체가 소심한 민족성을 낳았다고 여겨진다. 몸과 마음에 소심함이 배어 있어 만사 조심스럽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게 분명 있지만, 일반인의 기질로 보면 분명 소심한 민족이다.
이에 비하여 우리의 기질은 그들과 많이 다르다. 진취적이고 과감하며 활달하다. 그러한 기질을 바탕으로 우리는 일본과의 발전 차이를 50년에서 30년으로, 다시 10년으로 줄여나갔다. 앞으로 10년만 더 노력하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겨룰 만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배울 건 배워서 힘을 축적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