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제조업자의 풍류론 (85회)

일터에 심겨진 한 그루 나무,

콘크리트로 포장하지 않는 숨 쉬는 한 뼘 맨땅의 가치가 소중하다.

삭막한 일상 속에서 잠시라도 눈이 즐겁고 마음을 쉬게 하는 것,

그게 풍류다. 그래서 나는 나의 풍류를 위해서 또 직원들의 풍류를 위해서

일터에 손바닥만 한 녹색 공간이라도 두려고 노력한다.

앞에서 빼앗긴 국제전선 이야기를 하면서 안양에 공장을 지을 때, 군산에서 향나무를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수십 년 뿌리박고 서 있던 나무를 제대로 옮겨 심는 것만으로도 큰 공사였다. 공장 본연의 기능과는 무관한 부분에 그만한 시간과 돈과 공을 들일 필요가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야말로 가치관의 문제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정부와 기득권자가 유착하여 형성해 놓은 어려운 산업 진입 장벽을 뚫고 전선 산업에 뛰어드는 신규업자의 절박함을 내 특유의 풍류로써 달랬다. 그것이 바로 공장 앞에 향나무 심기였다. 2만 5천 평 공장터의 나들목에 도열한 대한민국 최고 정원수들! 바로 내 나무 사랑의 상징이자 내 자존심의 표상이었다.

우리말에 ‘겉볼안’이라는 말이 있다. 겉을 보면 속의 내용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겉치레와는 다르다. 나는 공장을 지을 때 늘 조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공장 건물을 앉힐 때 어찌하면 조그만 자투리땅이라도 시멘트로 덮지 않고 그대로 남겨서 땅에 숨통을 틔어 줄 까 궁리한다.

나를 포함하여 현대 사회의 생업 전선에서 뛰는 사람들은 멀리 산하를 찾아 풍류를 즐길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더 일터에 심겨진 한 그루 나무, 콘크리트로 포장하지 않는 숨 쉬는 한 뼘 맨땅의 가치가 소중하다. 삭막한 일상 속에서 잠시라도 눈이 즐겁고 마음을 쉬게 하는 것, 그게 풍류다. 그래서 나는 나의 풍류를 위해서 또 직원들의 풍류를 위해서 일터에 손바닥만 한 녹색 공간이라도 두려고 노력한다.

나는 나무를 몹시 좋아한다. 그래서 여행길이나 출장길에도 나무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표현하고 충족시키는 데에 적잖은 시간을 할애한다. 여행지에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오래 못 만났던 지인을 수소문해 만나듯이, 나는 옛날에 책에서 보았던, 소문으로만 들었던 나무를 찾아가 만난다.

▲ 2008년 9월 일본 水前寺成 정원에서 장남, 손자와 함께

드문 일이긴 하지만 일본에 7천 년 된 나무가 있다고 해서 오로지 그 나무를 보기 위해서 가고시마에서 배로 한 시간 거리인 섬에 들어간 적도 있다. 규슈에 갔을 때는 사가 현의 3천 년 된 나무가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택시를 타고 찾아간 적도 있다. 지상에서 7천 년 된 생명체를 지금 내가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치 내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영겁의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에는 제주도 비자림에 820년 된 나무가 있다. 우리나라에 그 이상 오래된 나무가 있다는 소리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일본에는 1천 년 된 나무가 흔하고 2천 년 된 나무도 여러 그루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이 땅에는 왜 그만한 수명의 나무가 존재하지 않을까? 기후 조건이 나무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인가? 자연 재해 때문인가? 아니면 혹시 민족성의 문제인가? 나무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의문이 이렇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답을 찾기가 어렵다. 누군가 이 문제에 대해 나에게 시원하게 답을 주면 좋겠다.

나는 또 30여 년 전부터 풍금을 가까이했다. 지금도 명륜동, 제주, 마산, 다롄의 내 거처 한쪽에는 전자 오르간이 놓여 있다. 내 몸이 머무는 공간마다 전자 오르간을 비치해 두는 내 심리는 또 무엇일까?

공장에 조그마한 정원이라도 꾸며서 공간에 숨통을 틔우려 하는 심리와 서로 통한다. 그 또한 내 나름의 풍류다. 풍류를 지향하는 내 본능이 일터에서는 나무 몇 그루라도 심는 녹지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거처에서는 비교적 아늑한 위치에 전자 오르간을 배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내가 애써 조경해 놓은 공장의 정원이지만, 정작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장의 일과에서 그곳 나무 그늘 아래 휴식하는 여유를 누려 본적은 거의 없다. 오며 가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쾌해진다. 마찬가지로 전자 오르간 앞에서도 그저 식사 전후, 잠들기 직전, 토막 시간을 보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잠깐의 풍류가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전자 오르간으로 옛날부터 즐겨 부르던 노랫 가락을 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격무로 인한 피로가 풀리고 생기가 충전되는 것을 느낀다. 흘러간 옛 노래를 오르간으로 연주하면 노랫가락에 지난 일이 새롭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나는 정신 건강을 위해 주변에 나무를 심고 오르간 앞에 앉는다. 그리고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는 골프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