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싱 없는 샐러드
생각해 보면 가족을 이끌고 처음 서울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플라스틱 공장을 차린 초기까지 나는 식생활에 너무 소홀했던 것 같다. 그때 콩나물국과 창란젓을 물리도록 먹었다. 고기반찬으로는 가장 싸고 흔했던 생선인 임연수어를 주로 먹었다.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그세 가지 반찬은 지금도 반갑지 않다. 속초에서 갓 올라온 싱싱한 창란젓이 식탁에 올라와도 젓가락이 잘 가지 않는다.
1960년대에 들어와 삼영화학이 원활하게 굴러가기 시작하면서 자주 일본에 드나들 일이 생겼다. 일본 근대사의 상징적 존재인 데이코쿠(帝國) 호텔에 가본 것도 그때였다. 그때는 데이코쿠 호텔이 일본 유일의 호텔이었다. 내가 알기로 일본 정부가 19세기 말엽에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이 호텔을 지었다. 대일본국의 수도에 최고급 호텔이 없어서야 구미 열강을 어찌 맞상대하겠느냐는 판단에서 세운 것이리라.
훗날 여러 차례 증개축해서 규모를 키웠지만 당시 내가 본 데이코쿠 호텔은 빨간 벽돌의 3층 건물이었다. 하루는 그 호텔 양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게 됐는데, 여러 가지 서양 야채를 접시에 가득 담아서 내왔다. 그때는 그 음식의 이름도 몰랐다.
‘아, 이들은 푸성귀를 이렇게 먹는구나. 선진국 사람들이 먹는 방식이니 틀림없이 몸에도 좋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이 방식을 나의 아침 식탁에 도입했다. 이후 수십 년째 꾸준히 아침 식탁에서 야채를 한 접시씩 먹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내용물이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사먹을 수 있는 채소가 몇 종류 안 됐기 때문이다. 주로 당근, 오이 위주에 간혹 미8군 납품용 양상추 정도가 추가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하우스 채소가 보편화되면서부터 샐러드도 다양해졌다. 피망에서 시작해서 체리토마토, 샐러리, 빛 좋은 파프리카, 비트까지도 계절에 상관없이 내 아침 식탁에 오르고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꽤나 긴 세월이 흘렀다. 내 아침 야채 접시 내용물이 대한민국 야채 재배의 역사를 증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명 유입의 창구였던 데이코쿠 호텔 때문에 내 아침상이 ‘개화’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나는 그들의 야채 먹는 방법을 맹목적으로 따라 하기보다는 ‘이종환 식’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드레싱을 쓰지 않는 점이다.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여러 종류의 야채들을 먹기 좋게 썰어 수북이 접시에 담아 놓고 그 자연의 맛을 그대로 느끼며 먹는다.
나와 자주 아침식사를 함께하는 우리 회사 간부들은 이 드레싱 없는 샐러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있지만 가끔 밥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적잖이 곤혹스러워 한다.
싱싱한 야채는 그냥 먹어도 아삭아삭해서 먹기에 좋다. 그대로 간도 맞다. 시큼 달큼 기름기 도는 서양 양념을 뿌려 주지 않아도 충분히 그대로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야채가 입에 맞지 않아 멀리하는 사람이라면 드레싱 맛에라도 먹으려고 노력하는 게 낫겠지만 야채를 잘 먹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먹어 보라고 권장한다.
야채 한 접시를 천천히 잘 씹어 비우고 나서 고향 의령에서 떡방아 찧어 만들어 부쳐 주는 찹쌀떡 조그만 것 두 쪽, 조기나 가자미 아니면 대구 얇게 포 떠서 지진 것 한두 쪽, 호박죽이나 깨죽 조그만 공기로 하나. 이렇게 차근차근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나의 풀코스 아침 식사다. 이 나이 먹도록 별 탈 없이 기운차게 활동하는 나에게 사람들이 특별한 건강관리 비법이 뭐냐고 묻는데, 내가 고안한 이 균형 있는 아침 식단이 비결이라면 비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건강은 하늘과 조상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해방되던 해에 83세로 돌아가신 조부님, 85세로 돌아가신 부친에 이어 3대째 80세를 넘겨 장수하고 있다. 지금의 건강을 얼마나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 바로 내일 일도 알 수 없지만, 이제껏 장수한 것만도 하늘과 조상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 했으니, 위에서 내게 주신 건강을 잃지 않도록 몸을 함부로 굴리기를 삼가고 있다. 내 입에 맞는 음식들을 골고루 조금씩 잘 챙겨먹고 겸허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라 할 것이다. 늙었다고 상전 노릇만 하려 들지 말고 몸도 적당히 움직여야 한다. 휴일에 이따금 방 청소도 하고, 간단한 내 속옷 빨래는 내가 주물러 빨기도 하고 마당도 쓸곤 한다. 일이라 생각하면 힘들고 시간이 아깝지만 운동이다 생각하면 즐겁게 그런 일을 즐길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