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둔촌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정처 없이 그 곳을 떠났다. 천곡은 역적이 앉았다 간 자리는 없애야 한다며 둔촌 부자가 앉았다 간 툇마루에 불을 질러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한편 둔촌은 천곡에게 쫓겨나 산길을 걸으면서도 천곡이 진심으로 자기를 쫓아낸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멀리 가지 않고 길옆 덤불 속에서 찬 겨울밤을 맞고 있었다. 천곡은 둔촌이 아버지를 등에 업고 왔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날이 지고 손님들이 돌아가자 등불을 켜들고 산길을 더듬어 찾아 나섰다. 그는 산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둔촌 부자를 발견하곤 서로 얼싸안으며 산에서 내려왔다. 마침 길에는 눈이 쌓여 있어 둔촌은 신발을 거꾸로 신고 걸었다.
천곡은 밤이 깊은 후에 아무도 모르게 자기 집 다락방에 둔촌부자를 숨겨 주었다. 이렇게 하여 4년간에 걸친 다락방 피신 생활이 시작되었으니 그때가 공민왕 17년(1368년)의 일이다. 천곡은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했다. 갑자기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밥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게 하고 반찬도 많이 놓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긴 세월 동안 날마다 고봉에 가득 담은 밥을 먹어치우는 천곡의 식욕을 의아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비라 부르는 여종(女從)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제비는 주인이 진지 드시는 장면을 문틈으로 몰래 들여다보았다. 깜짝 놀란 제비는 그 광경을 안방마님에게 고했고, 그 말이 천곡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함구령을 내린다고는 하나 과연 비밀이 보장될까? 그래도 그 방법밖에 없어서 식솔들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만약 비밀이 새는 날에는 양가(兩家) 가문이 모두 멸망한다는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제비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제비는 결국 비밀을 지키느라 자결하고 말았다. 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여종 제비를 연아(燕娥)라 적고 있다.
둔촌 부자가 다락방에 숨어들어간 직후 영천에도 둔촌을 찾기 위한 수색이 시작되어 천곡의 집에도 포졸이 들이닥쳤다. 둔촌 부자를 쫓아버린 상황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천곡은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인 1369년 둔촌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아무 준비도 없었음은 물론 장례도 비밀리에 치러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실로 컸다.
천곡은 자기 수의(壽衣)를 내어다가 예에 어긋남이 없이 염을 하고 자기가 묻히려고 잡아 놓은 가묘 자리에 몰래 장사지냈다. 이곳이 바로 영천 도유리에 있는 광주 이씨 시조공 묘소인 광릉이다. 당시 국정을 주무르던 신돈은 공민왕 20년(1371년)에 실각하여 유배되었다가 곧 주살되었다. 장장 4년에 걸친 둔촌의 피신 생활도 끝이 났다. 둔촌이 떠날 때 천곡은 시로써 전별했고 그 시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둔촌은 판전교시사에 임명되었지만 곧 사직하고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천곡도 좌사간으로 세 번이나 불렸지만 나가지 않고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예부터 우의의 두터움을 말할 때 관포(管胞)와 양좌(羊左)를 들지만 둔촌과 천곡의 우의도 오래도록 기릴 만하다.
둔촌의 후손들인 우리 집안에서 중시조공 묘소 산 아래에 천곡의 은혜를 추모하기 위한 보은당(報恩堂)을 지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다. 충비(忠婢) 제비를 잊지 않기 위해서도 제비의 무덤 앞에 술과 밥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6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단을 유지하고 있다.
무덤 일대의 나현회관 앞에 둔촌 선생 유적비가 있고 후손들이 지은 재사(齋舍)인 추원재가 있다. 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이곳에 은거하여 정착한 사간 최원도, 장례원판결사 최형도, 형조참의 최정도 삼형제의 단을 수호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은 묘재인 나현재도 자리 잡고 있다. 둔촌과 천곡의 우정과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자기가 모시는 주인의 안전을 지키고자 했던 몸종 제비의 이야기는 영천뿐만 아니라 광주 이씨 문중에서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후손에게 한 광주리의 황금을 물려주느니 경서를 한 권 더 읽혀라’는 광주 이씨의 가훈도 둔촌(遁村) 선생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