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내 나이 85세이다. 보통 사람으로 치면 인생 결산기라 할 수 있다. 지금도 백수(白壽)는 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지만 하늘이 언제 부를지 누가 알겠는가? 나의 기업 인생 60여 년, (주)삼영 창업 50주년을 맞는 올해, 아직 내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을 때 자서전을 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흔히 자서전은 자신의 지난 일을 자화자찬하거나 미화하는 식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좋은 일이든 아니든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 주려 한다. 그리하여 나처럼 이 세상을 위해 뭔가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유명한 정치가도 아니고 대그룹 오너도 아니다. 위인이나 종교인, 혁명가는 더욱 아니다. 그 사람들의 자서전에는 보통 사람들이 따라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나는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과 같은 내가 어떻게 일반인이 생각하기에 보통 일이 아닌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알려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이 책을 보는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으리라.
나는 지금으로부터 85년 전 경상남도 의령 땅 우무실 마을에서 태어나 의령초등학교를 거쳐 인근 대도시인 마산의 명문 마산중학교(5년제)를 졸업했다. 중학교 졸업 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나는 일본 메이지대학 경상학과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1944년 대학 2학년을 마치자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일본 관동군 소속으로 소.만 국경과 오키나와를 오가며 사선(死線)을 헤매다 8.15 해방을 맞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모교인 의령초등학교에서 잠시 교사 생활도 했고 정미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정미소 운영도 기업 활동이라고 한다면 나의 기업 인생은 60년이 넘는다. 그러나 본격적인 기업인으로서 활동한 것은 1958년 서울에서 삼영화학공업주식회사를 창업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기업 인생은 올해로만 50년이 된다.
나는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의 창업 1세대에 속한다. 창업 1세대들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던 시기에 파란만장한 기업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기업 세계에서도 최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는 사자와 같은 최강자뿐만 아니라 토끼와 같은 약자도 살고 있다. 주위 환경과 여건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는다. 이른바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 배운 이 법칙을 창업기의 기업 경영에 적용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경영 이론이 없었다. 또 있었다 해도 우리 현실에는 잘 맞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이 적자생존의 법칙을 내 기업에 접목하고, 변화를 선도함으로써 정글 속에서도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 경영 이론이 아무리 발전했다 해도, 또한 시대가 변했다고 하더라도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은 역시 적자생존과 변화라 믿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난 50년 기업 경영을 해 오면서 구두쇠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빚 없는 경영’을 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고 그것을 나의 경영 철학으로 삼았다. 그 결과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내가 이 재산을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면 영원한 구두쇠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내놓았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기업 인생을 마무리하고 있다. 세속적인 시각에서는 “어떻게 일군 재산인데 바보로군”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다. 그렇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는 “나는 바보라도 큰 바보다”라고 답해 주고 싶다.
또 일부 사람들은 “이름 좀 알리려고 그런 거겠지?”라고 미심쩍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름 알리기 위해서라면 내가 내놓은 재산의 10분의 1, 100분의 1만으로도 가능한 것 아닌가? 내 재산을 사회에 내 놓은 이유는 그렇게 세속적인 데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두쇠가 천사 됐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구두쇠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다. 오히려 “구두쇠 같던 사람이 천사처럼 됐다”고 한다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모든 것을 사회에 쾌척(快擲)한 사람, 그 자체로 이해되길 바랄 뿐이다.
내 재산의 사회 환원으로 창립된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은 세계 1등 인재 육성을 위한 아시아 최대의 장학재단이다.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못했어도 돈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련다’는 내 생활 철학을 실천하는데 재단 설립의 목적이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학문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와야 한다. 우리나라의 선진화는 물론 인류의 공동 번영을 주도해 나갈 초일류 영재들을 많이 길러내야 한다. 내가 사회에 환원한 재산도 바로 여기에 쓰이고 있다.
내가 자서전 이름을 《정도(正道)》라 붙인 이유는 내가 ‘정도’대로만 살았다기보다 늘‘정도’를 추구하면서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정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실정법과 어긋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기업 초창기에 우리 사회의 법규와 질서는 불완전했다. 나는 그 구불구불한 길을 올바른 길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에 현실적으로 나 자신이 손해를 보고 또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내가 추구한 ‘정도’대로 법규나 정책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오늘날 지식의 창조와 변화와 혁신의 시대에는 기존의 틀에 얽매인 발상으로는 경쟁자에 비하여 뒤지게 마련이다. 낡은 틀을 깨고 새틀을 짜는 새로운 발상, 뉴 패러다임(New Paradigm)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추구할 ‘정도’이다.
이 자서전은 내가 ‘정도’를 추구한 과정의 빛과 그림자, 성공과 실패, 성취와 좌절 등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일어나 마침내 손에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다시 빈손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기록이기도 하다. 가지고 있는 재산이 좋은 곳에 쓰이길 바라는 분들이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 책을 통하여 새로운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여러분의 기탄없는 평가가 나온다면 내 여생의 길잡이로 삼으려 한다.
끝으로 나는 생전에 우리 관정장학생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비록 내가 하늘나라로 간 뒤에 나오더라도 그 뉴스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와 나와 함께 기뻐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2008년 봄볕 따스한 어느 날
서울 명륜동 집에서
이 종 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