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봄에 양수리 별장에 다녀온 적이 있다. 외환 위기로 나라가 휘청하기 바로 전 해(1996년)에 마련해 놓고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래 머물러 본 적이 없는 집이다. 그만큼 여유 없이 바삐 보낸 탓이다. 그래서 그때에는 정말 벼르고 또 별러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사흘 밤만 모든 것을 잊고 머물다 오리다’ 굳게 마음먹고 갔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서 그렇긴 하지만 아직도 별장을 지니고 산다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그러다 보니 나도 별장 이야기를 하려니 약간 망설여진다. 그러나 오해는 없기 바란다. 거기는 호화 별장이라 불리기에는 좀 억울한 곳이다. 사치를 생태적으로 멀리 하는 나에게는 애당초 호화 별장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마당 끝나는 곳에서 돌계단 세 개만 내려가면 바로 강물이라, 그거 하나 쓸 만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곳이다. 또 하나 느티나무가 빙 둘러 심어져 있어서 여름철에는 녹색(綠色)이 동굴을 이룬다. 사원들 연수용으로도 쓰고 재단 장학생들이 함께하는 행사에도 써왔다.
그때 거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창 너머 가득한 강물을 바라보았다. 양수리 강물의 흐름은 정중동(靜中動)이라는 말의 뜻을 가장 잘 실감하게 해 주었다. 흐르는 듯 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을 그 강물에 실어보려 했지만 잘 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마음과 흐르는 강물은 대조적이라는 느낌만 들었다. 강물은 상류에서는 급하게 흐르지만 아래로 내려올수록 느려지지 않는가? 우리 인생도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았다.
‘나도 저 유유한 강물을 따라 흐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내 나이 여든다섯, 마음의 강물은 빠르게도 흘러가는구나!’
젊은 시절 나도 시에 탐닉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같은 강물을 보더라도 그때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젊은 날의 감성보다는 이성이 나를 더 지배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 되어가는 것인가? 감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성이 고개를 들어 나를 깨웠다. ‘ 공장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어느새 나는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이렇게 일에만 매달려 한평생을 살아왔다. 그래도 일에 파묻혀 일찍 쓰러지지 않고 오늘까지 건강하게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 비결은 일 속에서 여유를 찾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홀로 풍금 앞에 가 앉는다. 이 노래 저 노래, 악보 없이 연주를 한다. 이게 나의 유일한 오락이다. 그뿐이다. 풍금 연주에 더 심취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내 생활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이 없다.
그래도 이 풍금 연주는 일의 찌꺼기를 날려버리고 건망증이나 치매를 예방하고, 다음 일을 상쾌하게 시작하도록 해 준다. 덕분에 나는 기업가로서 타고난 능력을 남보다 조금 더 발휘할 수 있었다. 그게 없었다면 50년 동안 기업을 키우며 여기까지 헤쳐 나올 수 있었을까? 그 파란만장한 과도기와 현대사의 격동기를 정치와는 철저하게 담을 쌓은 채 큰 바위 같은 모습으로 꿋꿋이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그만한 기업가적인 소질과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회한(悔恨)의 순간들도 많았다. ‘그때 그 일을 했더라면……’,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때는 기업을 더 크게 일으킬 만한 운명적인 기회를 붙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호기(好機)는 나를 비켜 지나가 버렸다. 따사로운 봄날 사흘 동안 머물렀던 양수리 별장도 그 해 여름에 처분했다. 별장을 팔고 받은 돈은 교육재단에 전액 출연했다.
그 별장이 남의 소유가 되기 얼마 전에 연락이 닿는 문중 사람들을 모두 별장에 초대하였다. 100명 가까운 손님들이 모여 강가 느티나무 아래에서 점심을 함께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면면을 살펴보니 나를 중심으로 모두 10촌 안에 드는 일가친척들이었다. 그야말로 ‘대소가(大小家)’가 한자리에 모인 셈이라 반갑고 훈훈했다.
양수리 별장의 느티나무 터널은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공간이다. 서울을 빠져나와 양수리 별장에 가까워지면 멀리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차에서 내려 그 그늘을 따라 뚜벅뚜벅 걸으며 시원한 강바람을 만끽했다. 그늘 아래 놓인 평상마다 정겨운 손님들로 붐볐으니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장면이었다.
고향을 등지고 온 지 60년 만에 집안 손님들과 회포를 푸느라 부지런히 자리를 옮겨가며 술잔을 권하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일가(一家)간의 정을 가까이 붙여 보는 이런 자리를 왜 진작 마련하지 못했던가? 앞으로도 자주 모이는 것으로 만회하리라 다짐했다.
그 날의 가장 찡한 만남은 동갑내기에 한 동네 살던 8촌 누이동생과의 해후였다. 1943년에 그 누이가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혼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걸음을 했던 게 마지막 만남이었으니, 무려 63년 만의 해후였다. 우리 집은 수백 석 농사인데 그 누이네는 수천 석을 하는 부자였다. 한여름 물가 그늘에서 그 누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한줄기 강바람이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무심히 흩뜨려 놓았다. 귀소본능 때문일까? 나는 먼 길을 돌고 돌다 이제 옛날로 되돌아가 이 자서전을 쓰고 있다.
일본 가마쿠라 시대 겐페이(源平) 전쟁에서 겐지(源氏)와 맞붙었던 헤이케(平家)의 무용담을 담은 구전 소설 《헤이케모노가타리 (平家物語)》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종소리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울림이 있고 사라쌍수(沙羅雙樹)의 꽃 빛깔은 성자필쇠(盛者必衰)의 이치를 나타낸다. 교만한 자 오래가지 않으니, 다만 봄밤의 꿈과 같고 용맹한 자도 마침내 사라지니, 한줄기 바람 앞의 티끌과 같다.’
불교적 색채가 짙은 이 시 구절은 《헤이케 모노가타리》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겐페이 전쟁에서 겐지가 이기고 헤이케는 멸족을 당했지만 겐지도 30년을 가지 못한 것을 말한다. 영광스런 승리와 처절한 패배, 비정한 암투와 피비린내 나는 전투, 사치한 귀족문화와 철저한 서민문화, 불같은 사랑과 서릿발 같은 증오, 불굴의 집념과 통한의 단념 ……. 이 모든 인간사가 결국은 한 줄기 바람 앞의 티끌과 같다는 것이다. 사라쌍수(沙羅雙樹)는 석가의 병상에 마주서 있다가 석가의 입멸과 함께 시들었다는 나무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지만 늦가을 깊은 산속 절간의 종소리에서 세상사의 무상함을 느끼는 경지를 얼핏 알 듯하다. 귀를 스치는 평범한 한 줄기 종소리 안에 사실은 무한한 진폭(振幅)이 숨겨져 있다. 고인 듯 흐르는 저 한강물과 상통하는 인생의 이치다.
세상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부단히 변화한다. 나는 권력은 멀리했지만, 재력은 가까이했다. 하지만 화려하게 피어난 꽃도 이내 시드는데 권력이며 재력이야 말해 무엇하리오!
나는 이제 앞으로의 여생에서 내가 일으킨 삼영그룹이 미래 지식정보 사회의 선도자가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장학생들이 노벨상을 받도록 도울 것이다. 그리고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장학 사업을 추진해서 통일을 앞당기는 데 이바지하려 한다.
언젠가 하늘나라에 갈지라도 그것을 지켜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오래 살았다는 삼천갑자 동방삭도 18만 년밖에 살지 못했다고 한다. 진시황도 그렇게 찾아 헤맸건만 불로초를 끝내 찾지 못하고 갔다. 죽어서도 현세와 같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기 위해 수많은 토용 신하들을 거느리고 갔으나 부활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불로초를 오늘의 DNA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가야 할 사람은 가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뭔가 변화를 주고 가야 한다.
내 한평생 일군 재산도 세상의 좋은 일에 실어 보내면 오래오래 좋은 변화를 일으키는 물결이 되리라. 나는 그 비결을 관정교육재단에서 찾았다. 돈으로 세상을 얻는 길은 이 길밖에 없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