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우의의 두터움을 말할 때 관포(管胞)와 양좌(羊左)를 들지만
둔촌(遁村)과 천곡(泉谷)의 우의도 오래도록 기릴 만하다.
10여 년 전에, 내가 태어난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우무실 마을 고향집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재실(齋室)을 새로 지어 종중에 헌정했다. 그 건물 이름을 추모재(追慕齋)라 하고 추모비도 세웠다.
건물은 제대로 찌고 말린 나무만을 사용하여 오래도록 변하지 않게 정성을 다해 지었다. 부속 위토(位土)까지 마련하여 헌정했다. 고향을 떠날 때 마음먹었던 일을 도시에 나온 지60 년 만에 실현한 것이다.
종중 재실인 창랑정(滄浪亭)이 낡고 퇴락하여 그곳에서 시제(時祭)를 모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그동안 명당자리를 골라 묘를 쓰느라 조상님들의 묘소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고, 세상 풍속이 달라져서 시제를 정성껏 지내는 일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런 사정을 더 방관할 수 없어 추모재를 건립하고 흩어져 있던 10대 선조의 묘까지 선산(先山)에 함께 모시게 되었다.
나의 고향에는 내가 어릴 적 살던 기와집이 거의 헐리고 본채 일부의 흔적만 남아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와도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었다. 추모재를 세우고 나니 그런 마음이 어느 정도 풀렸다. 매년 가을이면 전국에 흩어져 사는 광주 이씨 문중 사람 200여 명이 그곳에 모여 시제를 지내고 있다.
조상에 대한 나의 정성이 남다르다는 것은 20여 만 광주(廣州) 이 씨 문중에서도 인정해 주고 있다. 서울살이 초기에도 형편이 닿는 대로 종사(宗事)에 힘을 보탰다. 나보다 일찍 서울에 터를 잡아 형편이 훨씬 여유로운 사람들조차 종사를 소홀히 할 때에도 나는 그 일의 중요성을 잊은 적이 없다. 그런 노력이 조금씩 쌓여 3~4년 동안 대종중 회장직도 맡은 바 있다.
먼 윗대 조상에 대해서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정성을 다했다. 오늘날 몸도 건강하고 사업도 차질 없이 일구어 올 수 있었던 것도 나의 정성에 대한 조상님들의 감응이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후손들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강조하는 말이 있다.
“요즘은 복도 하늘이나 교회나 절에서 내려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시대지만 사실 가까운 부모 잘 모시고 조상 잘 섬기는 데서부터 출발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광주 이씨 시조(始祖)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에 있고, 시조 비(碑)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시조 묘소의 재실도 내가 주도하여 20여년전에 지었다. 그래서인지 광주 이씨 문중에서는 2006년 경기도 광주 선영에 나의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또 경상남도 의령군에서는 2007년 고향 땅 내 생가 옆 추모재 앞에 ‘관정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나는 광주 이씨의 중시조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과 영천 최씨 천곡(泉谷) 최원도 선생의 학문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듣고 자랐다. 다른 사람 앞에서 집안 자랑하는 것은 팔불출 중에 하나일 수도 있지만 마침 《영천뉴스》에 관련 기사가 나왔기에 소개한다.
천곡은 영천 최씨인 원도 선생의 호다. 그는 고려 말 때의 사람으로 요승 신돈(辛旽)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 땅에 내려와 칩거하고 있었다. 둔촌 이집과는 같은 해 과거(科擧)에 급제한 인연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어느 날 둔촌은 이웃에 살고 있는 신돈의 측근인 채 판서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비판하며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 말이 신돈의 귀에 잘못 전해지는 바람에 큰 화를 자초하게 되었다.
큰 화를 예견한 둔촌은 연로하신 아버지를 등에 업고 영천에 있는 천곡을 찾아 나섰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산길을 택해 걸었다. 천신만고 끝에 몇 달에 걸려 천곡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계절이 겨울이었다. 천곡의 집에서는 마침 많은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천곡의 생일잔치였다. 둔촌 부자는 바깥 툇마루에 앉아 피곤한 몸을 쉬며 천곡을 찾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천곡은 반기기는 커녕 오히려 크게 화를 냈다.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싣고 오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소리치며 내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