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종 때의 대학자 성현(成俔促)의 명저 《용재총화(傭齋叢話)》를 보면 당시 번성했던 집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도 처음에는 이 대목을 보고 반신반의 하였으나 용재총화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금 문벌(門閥)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가 으뜸이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 성(成)씨만한 집안도 없다.”
성현은 그 배경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당대(當代)의 글이니 별다른 왜곡이 있을 리 없다. 참고로 성현은 창녕 성씨다.
“광주 이씨는 둔촌(遁村) 이후로 점점 커졌으니 둔촌의 아들 지직(之直, 삼형제 중 장남)은 참의(參議)였다. 지직은 아들이 셋인데 장손(長孫)은 사인(舍人, 지금의 총리 비서실장)이었고, 인손(仁孫)은 우의정이었고, 예손(禮孫)은 관찰사였다. 장손의 아들인 극규(克圭)는 지금 판결사(判決事)로 있다.”
나의 뿌리는 둔촌 이집의 22세손으로 지직을 거쳐 인손으로 이어진다. 다시 《용재총화》를 인용하겠다.
“우의정 인손(지직의 둘째 아들)에게도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극배(克培)는 영의정 광릉부원군, 극감(克堪)은 형조판서 광성군, 극증(克增)은 광천군, 극돈(克墩)은 이조판서 광원군, 극균(克均)은 중추부지사였으니 모두 1품 벼슬에 올랐다. 네 아들은 모두 나라에 공(功)이 있어 군(君)으로 봉한 것이다. 둘째 광성군은 비록 일찍 죽었지만 그의 아들 세좌(世佐)는 광양군이다.”
묘하게도 나의 뿌리는 성현이 언급한 광성군 이극감에서 광양군 이세좌로 이어진다. 당시 기록이나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야! 그때 내가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 그대로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겠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니지. 조선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누구의 모략에 걸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다반사였던 때가 아닌가!’라며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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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재총화(傭齋叢話) 3편 (전 3권으로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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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내 집안 자랑을 위해 족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는 방편의 하나로 나의 집안 배경을 아는 게 도움이 될 테고, 또 내 개인적으로도 간략하게나마 우리 집안의 큰 흐름은 정리를 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조부터 예종을 거쳐 성종까지 광주 이 씨의 집안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는 ‘팔극조정(八克朝廷)’이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팔극조정이란 인손의 다섯 아들 외에 장손의 아들 극규(克圭)가 병조참의, 예손의 두 아들 극기(克基)와 극견(克堅)이 각각 예조참판과 좌통례로 중앙 조정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식자(識者)들이 만들어 낸 말이다.
훗날 조정으로부터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은 이극감은 집현전 학사를 거쳐 세조 때는 세자의 교육을 맡았다. 38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관직도 형조판서까지 이르렀다. 세조가 얼마나 그를 아꼈는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에 광성군이라는 좌익공신 3등을 내린 데서 알 수 있다. 많은 역사가들은 조금만 오래 살았더라면 정승의 반열에 올랐을 인물이라고 평한다. 그만큼 학식과 덕행이 겸비된 인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서거정이 우리나라의 역대 명문(名文)들을 수집 정리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이라는 책에는 이극감이 대동강변에서 지었다는 시 한 수가 들어 있다. 한때의 내 마음과 같아서 애틋함이 더하다.
江上雪銷江水多(강상설소강수다) 강가에 눈 녹고 강물 불어나니
夜來聞唱竹枝歌(야래문창죽지가) 밤이 되니 댓가지가 빚어 낸 수심가(愁心歌) 들리네
與君一別思何盡(여군일별사하진) 님과 이별한 슬픔 어찌 다하리오
千里春心送碧波(천리춘심송벽파) 애절한 이내 마음 저 푸른 물결에 실어 보내리
